[세상만사] 흩어진 신뢰

입력 2025-05-16 00:38

얼마 전 지인이 보험회사 믿을 게 못 된다며 하소연을 해 왔다. 장염에 걸려 2주간 병원 신세를 지고 A사에 보험금을 청구했는데, 질병 코드에 장염이 아닌 심혈관 질환으로 적혀 있었다고 했다. B씨도 처음엔 몰랐다. 다른 보험사 상품에 가입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해당 보험사에서 최근 진료받은 게 있다며 심혈관 질환이 있는지 물으면서다. 놀란 지인은 곧바로 A사에 항의했고, A사는 “직원 실수”라며 그제야 수정해 줬다고 한다. 지인은 만약 자기가 타 보험사 상품을 알아보지 않았다면 여태껏 몰랐을 거라고 했다.

이와 비슷한 일은 더 있다. 직장인 최모씨는 입금된 보험금에 의문을 품고 보험사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간 보험사에서 어련히 알아서 제대로 주겠지 생각했던 그는 생각보다 적은 보험금에 약관을 뒤졌다. 계산해 봤더니 확실히 적게 입금된 게 맞았다. 보험사 측은 처음에 “그럴 리 없다”며 최씨가 잘못 안 것일 거라고 몰아갔다. 그러나 최씨가 약관에 따른 계약 내용을 읊자 몇 분 뒤 “계산 착오였다”며 미지급한 보험금을 바로 입금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최씨는 “이래서야 믿을 수 있겠느냐”며 “앞으로 보험금 청구 때마다 매번 계산을 해야겠다”고 했다.

보험업계에서 보험금 지급 문제는 보험사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주요 요인 중 하나다. 글로벌 PR 컨설팅 기업 에델만이 보험금 청구 경험이 있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35%가 지급 경험 이후 보험사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다고 답했다. 금융 당국에 접수되는 보험 관련 민원도 보험금 지급 항목이 가장 많다. 보험사들은 보험금 지급 관련 민원 건수가 해마다 줄고 있다며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항변하지만 앞선 지인의 사례나 최씨의 사례는 민원 건에 잡히지도 않는다. 스스로 알아내고 따지고 항의하지 않으면 그대로 지나가 버리는 일들이다.

이런 일들이 비단 보험업계에만 국한된 일일까. 일상을 둘러보면 곳곳에서 비슷한 균열이 보인다. 에델만은 매년 국가별 신뢰도 지표도 발표하는데, 이에 따르면 올해 대한민국의 신뢰지수는 41%였다. 조사 대상 28개국 중 27위다. 25위였던 지난해보다 순위가 2단계 하락했다. 신뢰지수가 60% 이상이면 ‘신뢰’, 50~59%는 ‘중립’, 50% 미만은 ‘불신’을 의미한다. 정부 38%, 미디어 38%, 기업 43%, 비정부기구(NGO) 46% 등 그 어떤 기관도 국민의 신뢰를 온전히 얻지 못했다. 지금보다 나을 것이란 낙관론도 24%로 28개국 평균 36%보다 낮았다.

쌓아 올린 신뢰가 흩어지는 건 한순간이다. 그리고 이는 언제나 작은 틈에서 시작된다. 책임 회피, 거짓, 반복된 무성의가 불신의 골을 깊게 한다. SK텔레콤 유심 정보 유출 해킹 사태에 고객들이 등을 돌린 건 유출 자체보다 이후 대처에 있었다. 왜 빨리 알리지 않았나, 무엇을 숨겼는가에 대한 의문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10년 넘은 오랜 충성 고객들조차 떠나게 했다.

정치인들이 공약을 얘기하는 걸 보니 선거가 가까워졌음을 실감한다. 공약을 풀어쓰면 ‘공적인 약속’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켜지지 않는 말’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더 많다. 신뢰는 약속으로 시작되지만 책임으로 유지된다. 날 믿어 달라는 목소리는 여전한데, 책임지고 설명하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실현 가능성은 제쳐두고 선명한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 공약은 표를 얻게 할 순 있지만 신뢰를 끌어내긴 어렵다. 작가이자 정치철학가인 한나 아렌트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뢰 없이는 약속도, 정치도, 미래도 존재할 수 없다.

황인호 경제부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