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강영애 (31) 18년 만에 나타난 성도 염치없는 부탁도 들어줘

입력 2025-05-16 03:04
1975년 강 목사의 제안을 계기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의료 정책에 주목하게 된 사실을 다룬 의사신문. 강 목사 제공

어느 날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최모 성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18년 전 내가 보증을 서줬다가 수억원의 재산을 잃게 만든 이였다. 그는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며 장례 예배를 부탁했다. 남편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사람이니 마지막 길도 내가 인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도망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찾아오다니’ 싶기도 했지만, 나는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기로 했다.

그는 내가 무료야간진료소를 운영하던 시절 보건사회부에서 근무하던 인물로, 키도 크고 예뻤으며 일 처리 능력이 탁월했다. 내가 진료소를 떠난 뒤에도 그는 서너 해 더 남아 봉사를 이어갔다. 그 무렵부터 내가 담임으로 섬기던 동교중앙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이후 가족과 함께 한누리교회까지 따라왔다.

그는 과거 청와대에서 알던 사람들과 여전히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가끔 돈 자루를 실은 트럭이 청와대를 나가는 모습을 직접 봤다”는 주장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디 그따위 소릴 하나. 그런 게 있어도 네 것은 안 된다, 헛것에 휘둘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남편 장례식 후 대여섯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던 그가 갑자기 또 전화를 걸어왔다. “백병원에 입원 중인데 암 수술을 앞두고 있다”며 “매일 아침 전화하겠으니 꼭 기도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목사님이 저 살려주셔야 돈 받습니다”라는 농담 같은 협박도 덧붙였다. 기가 막혔다. 그는 어김없이 매일 새벽 5시면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100일을 넘겨 120일간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렇게 살아난 최씨는 또다시 연락을 끊었다.

1년 넘게 소식이 없더니 2023년 늦은 봄 불쑥 들꽃카페에 나타났다. 이번에도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비자금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주장은 이랬다. 10·26 사태 이후 현금과 채권, 금 등이 트럭 세 대 분량으로 반출됐고, 이 비자금을 세 사람이 나눠 각각 관리하게 됐다는 것이다.

최씨에 따르면 그 자금을 관리하던 세 사람 중 한 명이 사망했고 이후 숨진 사람의 아내가 연락을 해왔다. 내용은 “300억원가량의 금을 매각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추진하기 위해 투자자 20명을 모았고 그들로부터 매각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했다. 이번에도 ‘그 일이 잘 성사되도록 기도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래야 목사님께 빚진 돈을 갚을 수 있다”는 말도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 비자금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울 가십거리였겠지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인지 확인할 길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나를 최씨는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그가 얘기했던 일은 결국 성사되지 않았을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또 엉뚱하게 찾아올 줄 알았는데, 무더웠던 지난해 여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실체 없는 비자금의 정체만 좇던 그의 삶은 그렇게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졌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