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편백 향이 불러온 기억

입력 2025-05-16 00:32

초록이 씩씩하게 자라나는 5월이다. 금방이라도 비를 흩뿌릴 듯 하늘이 흐리다. 간단한 먹거리를 사서 숙소로 가는 길에, 부러 골목길을 돌아 걸었다. U자로 구부러진 골목으로 접어들자, 고택이 몇 채 늘어서 있었다. 그중 어느 집에서 향을 피우는지 편백 향이 그윽했다. 그 향을 좀 더 맡고 싶어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발 딛고 있는 시공간이 전환돼 마치 고요한 숲속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상쾌한 느낌이 아니라, 어쩐지 쓸쓸한 기분마저 들었다. 왜 그럴까. 기억을 더듬어 보니 시어머니의 베개 때문이다.

그 향은 오래전 시어머니가 자주 사용했던 편백 베개를 떠오르게 했다. 베개 속에 편백 조각이 들어 있어서 편백 향이 났다. 통나무 목침도 있었다. 통나무 반을 쪼개 아랫부분을 아치형으로 도려낸 것인데, 시어머니는 고개를 도리도리 돌려가며 목덜미를 지압하곤 했다. 목침이 높고 딱딱해 나는 자주 사용하지 않았다. 한번은 시어머니가 내게 쑥뜸을 떠보자고 권했다. 나는 화상을 입을까 겁이 나 처음에는 사양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 손가락에만 몇 개 쑥뜸을 놔달라고 했다. 시어머니가 혈자리 위에 원뿔 모양의 쑥뜸을 올리고 불을 붙였다. 작은 활화산을 손가락 위에 얹은 것만 같았다. 쑥뜸 봉우리가 타들어가면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손가락은 뜨거웠고,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웠다. 이 고통스러운 걸 뭐하러 하나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몸의 근육이 부드럽게 이완되고, 손끝에서 시작된 온기가 몸 전체로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쌉싸래하고 풋풋한 쑥 향이 방에 가득 찼다. 이제 시어머니는 뜸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으니 이런 기억마저도 옛일이 됐다. 뜸을 뜨고 거실에 나란히 누워 낮잠을 잤던 봄날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시어머니의 건강을 기도하며 향을 피운다. 연기가 가늘게 올라가다가 헝클어지듯 흩어진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