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거울의 방에 갇힌 사람들

입력 2025-05-16 00:34

권력 향해 질주하는 이유는
힘=정당성이라는 오류 때문
확신 빠진 자기 기만 버려야

요즘 들어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벼워졌는지를 자주 생각한다. 진실이냐 아니냐는 이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증거가 뚜렷하고 수많은 사람이 보고 들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실을 뒤엎는 말을 들을 때마다 묻게 된다. 저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진실이라고 믿는 걸까.

거짓말에는 두 종류가 있다. 남을 속이는 거짓말, 그리고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 전자는 사기이고 심하면 처벌까지 받는다. 문제는 후자다. 자기 기만은 종종 무의식 중에 일어나고, 당사자는 오히려 자신이 선의를 갖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개화기의 계몽운동가 중에 윤치호라는 인물이 있다. 일본과 미국에 유학했고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다. 교육자이자 지식인이었던 그는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에 협력했다. 그는 그것이 현실을 직시한 ‘합리적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이길 수 없는 일본과 싸우는 건 백성을 죽음으로 이끄는 길이므로 실력을 길러 독립의 때를 기다리는 게 현명하다고 했다.

그는 민족 차별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싸워서 이기기에는 일본이 너무 강하다고 봤다. 더욱이 그 일본이 패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말로는 민족을 앞세우면서 친일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자기합리화가 필요했다.

윤치호는 그것을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라는 말로 요약했다. 싸워서 이길 힘이 없는 자는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다. 싸움은 무모하고, 침묵은 지혜롭다는 이분법 뒤엔 사실상 저항을 포기하라는 논리가 깔려 있다. 인간의 존엄과 자율성, 정의에 대한 감각은 그 안에서 흐릿해진다.

그는 힘이 정당성을 결정한다는 오류에 빠져 있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권력을 향해 질주하는 이유가 이런 믿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말해준다. 약하지만 침묵하지 않았던 아래로부터의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꿔왔다는 것을. ‘싸워서 이길 수 없으면 입 다물라’는 단순한 선택지 너머에서 인간은 현실의 모순에 맞서 다양한 방식으로 행동해 왔다.

자기 기만은 교묘하다. 현실을 똑똑히 보고도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서, 오히려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 주장한다. 자신을 정당화하다 보면 어느새 거울의 방에 갇히게 된다. 그 방 안에서는 확신에 찬 자기 모습만이 끝도 없이 보인다. 비판은 들리지 않고, 반성은 멀어진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증상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심한 것 같다. 우리는 고위 공직자나 유력 정치인이 더 깊이 자신을 성찰하고, 더 무겁게 책임을 지는 사람이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들이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말장식을 동원하는 모습을 본다. 자기 확신으로 무장했지만, 그 안에는 실질이 없다.

모순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속인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자기의 신념과 말과 행동 사이의 부조화를 알아챌 수 있을까. 부조화로 인한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내면에서 반복되는 자기합리화를 깨닫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기 확신이라는 거울의 방에 갇히지 않으려면 우리에게는 자기정당화라는 달콤한 풍선을 터뜨려줄 믿을 만한 반대자가 필요하다. 우리가 현실에서 벗어나 거울의 방에 갇히려고 할 때 제자리로 이끌어줄 비판의 목소리가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특히 그래야만 한다.

계엄령의 겨울과 재생의 봄을 지나 대통령 선거가 다가온다. 다시 말들이 천지를 뒤덮고 있다. 좋은 사회는 ‘말’을 그대로 믿을 만한 사회다. 말과 진심이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애쓰는 사람이 바보 취급받지 않는 사회 말이다. 거울의 방에 갇혀 있지 않은 정치인들이 진심 어린 ‘말’로 시민과 마주하는 선거가 되길 바란다.

허영란
울산대 교수
역사문화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