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어른’ 대통령을 소망한다

입력 2025-05-16 00:30

웬일인지 몇 해 전부터 ‘어른’에 대한 강연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른’을 주제로 한 책 출간 제안도 있었다. 지난달 군 복무 중인 아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엮어 책을 냈는데, 아들의 편지에도 ‘어른’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었다. 최근 화제를 모은 다큐멘터리의 제목도 ‘어른 김장하’였다. 왜 ‘기부왕 김장하’가 아니라 ‘어른 김장하’였을까. 이 시대에 어른다운 어른이 드물다는 자조 섞인 현실 인식이 그 제목 속에 숨어 있다.

인터뷰 자체를 거부하는 기부왕을 주인공으로 삼은 터라 취재기자는 처음부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어렵게 응한 인터뷰에서도 팔순 노인은 질문에 거의 침묵했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정답을 내놓는 이른바 ‘나이만 먹은 어른’들과는 정반대였다. 방송 중 필자의 가슴에 남은 그의 답변이 있었다. “모른다.” 장학금을 준 학생 수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방송에서 김장하 장학생이었던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은 “혹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사회에 갚으라”던 김장하옹의 말씀을 떠올리며 울먹였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주면 돌려받기를 원한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특히 그런 태도가 강하다. 무조건적인 충성을 보여야 떡고물이라도 돌아온다. 선거철만 되면 이런 셈법에 익숙한 사람들로 후보 주변은 북적인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한 경선 후보에게 사람을 쓸 때 가장 중요시하라면서 ‘충성심’을 꼽기도 했다. 정적에겐 철저한 보복이 충성심의 표현이다. 모두 그저 나이만 먹은 어른들이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선생을 부인했지만, 부활한 예수는 충성 맹세를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묻고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며 그 사랑을 양에게 갚으라고 당부했다. 이후 제자들 또한 자신이 돌려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140여년 전 조선에 온 서구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와 병원을 세우면서도 자신들이 조직의 주인이 되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한국인이 주인 되는 조직을 꿈꿨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첫 한국인 교수는 당시 천민 취급을 받던 백정의 아들 박서양(1885~1940)이었다. 여러 선교사들은 받은 은혜를 가장 낮은 이들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진짜 어른은 자신에게 갚지 말라고 한다. ‘페이 백(pay back)’이 아니라 ‘페이 포워드(pay forward)’의 원칙을 따른다. 자신이 준 선의를 다음 사람에게, 다음 세대에 전하라고 한다. 이런 어른은 갚지 않는 이를 원망하지 않는다. 더 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뿐, 되받지 못한 것을 따지지 않는다. 자신에게 되갚지 않는 이들을 ‘배신자’로 몰아붙이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 지도층에게 이런 어른다움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정치권이야 늘 ‘페이 백’ 논리가 지배했다 해도, 최근 사법부의 정치개입 논란이 우려를 키우고 있다. 임명권자의 성향에 따라 대법원 판결이 갈린다는 비판마저 나오고 있다. 국민을 재판할 권리는 임명권자에게 갚아야 할 대가가 아니다. 직위는 힘 있는 자에게서 받았을지라도 그 권한은 힘 없는 자에게 향해야 한다. ‘99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이를 만들지 말라’는 말처럼 법은 약자를 위한 마지막 보루여야 한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 대통령은 ‘페이 포워드’를 실천하는 어른이길 바란다. 국민은 통치의 대상도, 계몽의 대상도 아니다. 선거에서 힘이 된 측근과 지지자에게만 보은하려는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그는 ‘어른’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지지자들도 대통령이 자신에게만 보답하길 기대하지 말자. 대통령은 자신에게 표를 준 이들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국민까지 모두의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