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전환과 산업 경쟁력은 병행 추진해야 할 시대적 과제
우리나라 기후·환경 정책도 성장 핵심 전략으로 정립하고
사회적 수용성과 참여 전제로 공감대 넓히고 신속히 추진해야
우리나라 기후·환경 정책도 성장 핵심 전략으로 정립하고
사회적 수용성과 참여 전제로 공감대 넓히고 신속히 추진해야
황희 정승(1363~1452)은 조선 세종 시대의 명재상으로 합리성과 포용력, 실용적 리더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집안 노비 둘이 다투자 각각의 말을 듣고 “네 말이 옳다”고 했고, 이를 본 부인이 “두 사람 말이 다 옳을 수 있느냐”고 묻자 “부인의 말도 옳소”라고 답한 일화가 유명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이야기는 경청과 공감으로 갈등을 조율한 사례로 회자된다. 그는 법보다 사람의 말을 중시하고, 상황의 맥락을 살펴 문제를 조화롭게 풀었으며, 늘 민생을 먼저 생각했다. 기계적 중립이 아닌 균형과 이해에 기반한 실용적 리더십은 오늘날에도 필요한 덕목이다.
탄소중립과 경제성장, 에너지 전환과 산업 경쟁력은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라 함께 설계하고 병행 추진해야 할 시대적 과제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대한민국은 저성장 위기에 직면했으며, 많은 국민이 체감하는 경기침체는 산업구조 전환과 새로운 성장 전략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기후·환경 정책도 이제는 환경보호를 넘어 미래 성장의 핵심 전략으로 재정립돼야 한다. 이런 배경에서 주목할 점은 성격은 다르지만 대표성을 지닌 두 집단인 공학한림원과 에너지전환연대가 최근 발표한 정책 제안에서 유사한 방향성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공학한림원은 시장 중심의 전력산업 대전환, 전력산업의 성장동력화, 전력망 인프라 확충, 혁신 플랫폼 기반의 에너지 신산업 육성 등을 통해 에너지 전환을 성장의 기회로 삼자고 제안한다. 공학한림원은 산업계 리더와 석학들로 구성된 공학계 대표 전문가 집단이다.
에너지전환연대는 에너지 대전환을 통한 경제 도약, 기후에너지부 설치, 독립 전문규제기관 설립, 모빌리티 산업 및 탄소중립 제조업 육성, 풍력·태양광 확대, 에너지 효율 향상, 일자리 창출, 에너지 민주주의 실현 등 8대 공약을 내세운다. 이 연대는 시민사회, 학계, 산업계가 함께하는 협력체로 지속가능한 전환을 위해 활동해 왔다. 그간 교류가 많지 않았던 두 단체의 제안은 핵심 방향성과 구조 개혁의 필요성 면에서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이는 진영을 넘어 탄소중립을 실용적 성장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권 초기는 에너지 전환 정책의 기본 틀을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에 따라 두 단체가 공통적으로 공감하고 제안한 내용을 바탕으로 필자가 해석하고 정리한 몇 가지 중요한 정책적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전기위원회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법적·제도적 기반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전기위는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조직에 불과해 전기요금과 시장 운영에 있어 자율성과 책임성이 부족하다. 공정하고 전문적인 전력 가격 결정을 위해 전기위를 정부 외부의 독립 규제기구로 격상할 필요가 있다. 둘째, 전력 배전 및 판매 시장 개방이 필요하다. 현재는 소수의 공기업이 전력 생산과 판매를 독점해 민간의 혁신 기술과 서비스가 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운 구조다. 도매·소매 시장 모두에 걸친 구조 개편이 이뤄져야 하며, 이는 재생에너지 확대, 에너지 소비자의 선택권 강화, 그리고 새로운 성장 산업을 위한 시장 생태계 조성을 가능하게 한다. 셋째, 대규모 전력 인프라에 대한 전략적 투자가 필요하다. 해상풍력, 고효율 송전망, 인공지능(AI) 기반 수요관리 기술 등은 전기화 시대의 핵심 자산이며, 새로운 일자리와 산업 경쟁력의 기반이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원자력폐기물관리법, 해상풍력지원법, 송전망설치지원법 등 ‘에너지 3법’은 그 출발점이다. 이를 실행 가능한 정책으로 연계하는 것이 정부의 책무다.
선도적이고 상징적인 정책 목표는 강한 전달력과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예기치 않은 갈등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실현 가능한 수준에서 단계적으로 추진되지 않으면 공허해질 수 있다. 사회적 수용성과 참여를 전제로 한 전략만이 갈등을 줄이고 공감을 넓힐 수 있다. 공감대가 형성된 과제는 신속히 추진하되, 이견이 있는 사안은 숙의와 조정이 필요하다. 원자력 에너지는 과거 정책 갈등의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국가 이익을 기준으로 실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황희 정승처럼 실용적 사고와 공감의 리더십이다. 탄소중립은 환경과 경제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AI처럼 미래를 바꿀 성장 기회다. 실행 가능한 전략과 국민 참여를 이끄는 정책은 새 정부 초기부터 과감하게 추진돼야 한다.
윤제용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