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가다 주변에서 ‘목소리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명징한 목소리를 가진 것도 아니고, 정확한 발성과도 거리가 먼지라 가벼운 덕담으로 이해한다. 다만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전화 한 통, 기사 한 줄에도 진땀 흘리던 초년 기자 시절이다. 후배가 여럿 생긴 지금도 마감 때마다 남몰래 속앓이하는데 그 당시는 어땠겠는가.
하지만 고민은 기사 작성에만 있지 않았다. 앳된 목소리가 문제였다. 어쨌든 사람 이야기를 듣고 취재해서 글 쓰는 직업 아닌가. 누군가의 마음을 여는 데 목소리가 방해되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하던 날이 다반사였다.
일부러 굵은 저음의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던 게 그때부터다. 첫 만남에도 신뢰감을 주기 위한 나름의 고육책이었다. 그쯤 취재원과 통화하는 모습을 본 한 교회 후배가 “목소리를 왜 그렇게 내느냐”고 핀잔한 일이 기억에 남는다. 5년 차를 넘기고 30대에 들어선 이후부턴 본연의 목소리로 취재원을 대한다. 신뢰는 목소리가 아닌 진정성, 꾸준함 등 본질적 요소로 얻어진다는 걸 체득해서다.
개인적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건 최근 한 책을 읽으며 본질의 중요성을 다시금 숙고했기 때문이다. 계기가 된 책은 한국 개신교 역사의 최초 사건 72가지를 소개한 신간 ‘한국교회 첫 사건들’(새물결플러스)다. 옥성득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석좌교수가 쓴 이 책엔 한국 개신교 전래와 한국 교회의 자립 과정이 각종 사진 자료와 함께 소상히 담겼다.
이 중 눈에 띄는 건 선조들의 사생결단 신앙이다. 장로교회 첫 장로이자 첫 목사인 서경조는 1887년 1월 세례를 받기 위해 미국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를 찾는다. ‘예수교’를 믿으면 피살될 것임을 알고 내린 용단이었다. 1925년 장로교 학술지 ‘신학지남’에 실린 서경조의 간증문에 이때 그의 심경이 잘 드러난다.
“‘이 책(신약) 속에 기이한 술법이 있으리라’ 기대하고 차차 모르는 것은 깊이 생각하길 여러 차례 해보니… 믿을 마음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서로 싸우기를 거의 반년이나 수고하다가 사도 바울의 마음을 보고 신심을 정하였으니.” 이후 서경조는 서슬 퍼런 시기에 복음을 전해 20명의 구도자를 얻었다. 또 형 서상륜과 함께 황해도 최초의 장로교회인 소래교회를 설립했다.
소래교회는 1895년 8칸 기와집 예배당을 완공했는데 이는 ‘한국인의 자금과 노동력으로 지은 최초의 한국인 교회’다. ‘초년생 교회’임에도 소래교회 교인들은 전도·교육·선교에 적극 나섰다. 교회당 건립 준비가 한창이던 1894~1895년, 인도서 대기근이 발생하자 교인들은 자발적으로 구호 헌금을 모았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소회다. “이 가난한 농부들과 소작농들은, 이들 중 일부는 하루에 20센트도 벌지 못하는데도 인도에서 굶주리는 자를 위해 56달러와 반지 8개를 헌금했다. 반지는 여자들이 손가락에 낀 것을 연보(捐補)한 것이다.”
사회적 소수임에도 대담하게 이웃 사랑에 앞장선 한국의 초기 기독교인은 이후 우리 사회의 교육과 자선활동, 항일운동과 여성 인권 신장 등에 크게 기여한다. 이들의 헌신으로 개신교가 한국의 주요 종교가 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올해는 한국 선교 140주년을 맞는 해다. 교계에선 이를 기념해 여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역사를 돌아보고 그 공과를 가리는 자리도 물론 있다. 후대가 선대의 행적을 돌아보고 평가한다고 생각하니 나 역시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간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자로서 아름다운 선교의 현장을 교회와 함께 써 내려갔는가. 분열 아닌 연합하는 교회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을 수 있게, 겉치레가 아닌 본질을 자랑하는 기독교가 돼야 하겠다. 우선 나부터.
양민경 미션탐사부 차장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