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오래 사세요” 교회, 장수사진관을 열다

입력 2025-05-14 03:13
사진 스튜디오 경력 20년차 권정운 은광교회 집사가 12일 서울 은평구 불광1동 주민센터에서 김학식 할아버지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셔츠를 곱게 차려입은 김학식(80) 할아버지가 검정 모자를 눌러쓴 채 서울 은평구 불광1동 주민센터에 도착했다. 입구에 들어선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분이 안 좋습니다. 이거 꼭 죽을 준비하는 것 같아서 조금 그렇네요.”

대기석에 앉은 김 할아버지의 눈빛은 불안해 보였다. 잠시 후 그의 입술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이유를 설명했다. “숨도 차고 몸이 많이 안 좋아졌습니다. 오늘 병원에서 들은 의사 말로는 6개월 정도 남았대요.”

사진 촬영에 앞서 메이크업이 시작됐다. 깊게 팬 주름과 검버섯 자국 위로 화장을 위한 붓이 지나가자 얼굴에 윤기가 돌았고 눌려 있던 머리칼도 단정하게 손질됐다. 카메라 앞에 선 그는 처음엔 어색한 미소를 띠었지만 플래시가 터질 무렵엔 제법 편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김 할아버지는 한때 방송국 리포터로 일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시절 혼자 산 적이 있었으나 나이가 들고는 주민센터 보안요원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았다. 언제부터 다시 혼자가 됐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했다.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그가 꺼낸 말들은 무심하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말끝마다 봉사자를 향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목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내디딘 김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헤어·메이크업 봉사자들이 어르신을 단장하는 모습.

은광교회(성백용 목사)는 12일 불광1동지역사회보장협의체(공동위원장 이정훈)와 함께 ‘이웃과 함께하는 장수사진 촬영’ 행사를 진행했다. 교회는 사진 촬영 전반을 맡았고 주민센터는 대상자 추천과 안내를 도왔다. 촬영에 참여한 75세 이상 독거노인은 총 18명이었다. 이날 하루 주민센터 대강의실은 한복 탈의실, 메이크업 부스, 사진 스튜디오로 탈바꿈했다.

성백용 목사는 “교회는 마을의 이웃이기에 지역의 필요와 요청을 경청하고 함께 걸어가야 한다”며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 이번에 처음으로 행사를 개최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 “사진 한 장이 어르신들께 정서적 안정과 존엄성을 되찾아드리는 시간이 됐기를 소망한다”고 덧붙였다.

현장에선 은광교회 교인 6명과 지역사회보장협의체 6명이 메이크업과 안내, 사진 촬영을 도왔다. 모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헤어디자이너 경력 15년차 김진희(51) 집사와 사진 스튜디오 경력 20년의 권정운(54) 집사 등 전문가들이 어르신 한 분 한 분에게 정성을 쏟았다.

천봉순(81) 할머니도 이날 촬영자 중 한 명이었다. 홀로 산 지 20년이 넘었다는 그는 아침 8시 복지관에 나가 점심 먹고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해 왔다고 전했다. 천 할머니는 “하지만 자녀에게 힘든 내색 한 번 해본 적 없었다”고 회고했다.

천 할머니는 장수사진을 찍은 후 되레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밝혔다. 그는 “진짜로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 싶다”면서도 “‘죽지 말자, 건강만 하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스스로 말한다. 앞으로도 더 건강하게 살아서 자녀에게 밝고 즐거운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청년들을 위한 격려도 이어졌다. 그는 “우리 청년들에게 ‘지금은 힘들고 정신없이 살아가지만 돌아보면 별일 아니다. 힘을 내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서울시에 따르면 은평구에는 2023년 기준 2만3291명의 독거노인이 거주한다. 이는 지역 노인 인구의 25%를 차지한다. 서울시 25개 자치구 가운데 네 번째로 높은 비율이다. 대한민국이 초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노인복지 서비스가 중요해진 만큼 홀몸노인들의 삶을 지지하는 작은 손길 하나하나가 더욱 절실하다.

이정훈 불광1동지역사회보장협의체 공동위원장은 “홀로 계신 어르신들은 장수사진을 스스로 준비하기 어렵고 그럴 기회도 잘 없는데 지역교회가 나서줘 감사한 마음”이라면서 “협의체는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해 장수사진 사업을 내년부터 정례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글·사진=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