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에서 가슴 속에 피가 고인 환자가 있다고 연락이 왔다. 피가 고였으니 다친 환자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환자를 보니 아픈 얼굴이 아니라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시술하는 내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무덤덤한 표정도 궁금했다. 더 의아했던 것은 뒤에서 들려오는 환자를 달래는 목소리였다. 쉰 살이 넘은 환자를 마치 아이 대하듯 하는 환자 형님의 말투 때문이었다. 가슴에서 배출된 것은 피가 아니라 고름이었다. 치료 환경이 좋아진 요즘 가슴 속에 고름이 고이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래서 섣부른 판단으로 건강을 챙기지 않는 환자일 것이라 생각했다. “병을 너무 오래 방치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환자의 형님은 다른 사연을 얘기했다.
“어머니가 동생을 가졌을 때 가난하고 집안 사정이 안 좋아 아기를 지우려고 약을 드셨답니다. 그런데 애가 죽지 않고 태어났어요.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지능이 떨어지고, 집안에서도 어쩌지 못해 동네 병원 다니며 고만고만하게 지냈습니다. 어머니는 몇 년 전 돌아가셔 장남인 제가 동생을 돌보는데 요즘 잘 챙기지 못했네요. 어쨌든 잘 부탁합니다.”
사연을 듣고 환자를 보니 영락없는 아이였다. 치료해야 할 환자가 아니라 지켜줘야 할 아이처럼 보였다. 그런 때가 있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이 궁핍했고 한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세상이 결정하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그때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지만 그 사람은 그러지 못했다. 환자는 가난의 결과를 질병으로 떠안고 태어났다. 말하자면 불행한 몸이었다.
어떤 환자들은 아프기만 한 게 아니라 불행하면서 아프다. 불행 때문에 자존감을 잃은 사람은 질병으로 인해 몸의 가치도 잃어버린다. 아픈 몸은 자신이 불행하다는 증거가 되고 불행한 몸은 치료받고 싶은 의욕마저 사라지게 한다. 질병은 존엄성을 갉아먹는다.
시술할 때 많이 아팠을 텐데 환자는 통증을 참았던 것 같다. 자신은 아파하면 안 되는 사람인 것처럼, 아픈 몸이 부끄러운 것처럼 시선을 피하며 움츠리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 환자가 짊어진 불행 사이로 의사의 역할을 억지로 끼워 넣어 봤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질병이 아니라 불행 앞에 서 있었다. 의료가 환자의 신체를 넘어서서 무엇을 더 해줄 수 있을까. 딱한 사연을 듣고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의료는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할 수도 있다. 가난이 더 이상 침범하지 못하는 곳이 한 사람의 신체라고 말할 수 있다. 환자의 몸은 세상사와 무관하게 회복되고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증명할 수 있다. 모든 행위가 그렇듯 치료행위도 무언가를 표현한다. 의료진은 치료를 통해 환자의 몸이 소중하다는 것을 계속해 말한다. 그들의 말은 감정이 없이 메말랐지만 그들의 행동이 땀을 흘리며 말한다.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의 불면의 밤이, 수술실에서 출혈을 막는 손들이, 멈춘 심장 위에서 가슴을 누르는 전공의의 땀 맺힌 얼굴이, 바쁘게 복도를 내달리는 간호사의 발걸음이, 그리고 코로나 시기 눈물 대신 땀으로 울었던 방호복 속 몸들이 말한다. 의료진의 몸이 말하는 소리가 환자의 몸에 울림을 만들어 낸다. 같은 진동으로 공명하는 두 물체처럼. 의료진의 고된 몸과 환자의 아픈 몸이 서로를 공감한다. 자신의 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의료진의 모습에서 환자는 자신이 얼마나 존엄한지 몸으로 깨닫는다. 이때가 잃어버린 존엄성을 찾는 시작점이고 의료가 환자의 신체를 넘어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지점이다.
나는 매일 사진을 확인하며 아이가 커가는 것을 바라보듯 환자가 회복되는 것을 지켜봤다. 병원 밖 세상이 환자에게 좀 더 관대하길 바라며. ‘관심은 가장 진귀하고 순수한 형태의 관대함이다.’(시몬 베유)
김대현
창원파티마병원
흉부외과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