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극단적 사실주의에서 극사실주의로

입력 2025-05-14 00:32

사실적 작품 거부하는 이유
엄혹한 현실 드러내기 때문
왜곡 없이 그대로 바라봐야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론 뮤익(Ron Mueck)이란 아티스트의 전시가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주말, 평일 가릴 것 없이 관람객이 줄을 서는 것이 심상치 않은 바람이라는 게 미술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보통 미술관 전시에서 줄을 선다고 하면 대중성에 기대는 경향이 다분하다. 미술계를 넘어서 보편적 문화 현상으로 알려진 클래식 아티스트 혹은 한 시대를 관통한 예술 사조를 대표한 이들의 전시에 주목하기 마련이다 인상주의 화풍의 거장이 된 반 고흐, 심미적 추상 표현의 거장이 된 마크 로스코, 팝 아트의 선두주자 앤디 워홀 등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품이 ‘줄을 서는 전시’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뮤익이란 아티스트는 현존하는 작가이며, 아직까지는 클래식한 대중성을 보유했다고 보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런데도 이 작가의 작품에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바로 그가 보여준 극사실주의 성향 작품에서 열광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북유럽 스타일의 코트를 걸친 여인, 홀로 외로운 항해를 지속하는 듯 보이는 배 위의 남자, 이불을 덮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누워 있는 젊지도, 아주 나이 들어 보이지도 않는 여자의 모습을 실제 사람의 모습과 같게, 아니 오히려 더 사실적으로 빚어낸 조각이 뮤익이 펼쳐 보이는 극사실주의의 향연이다. 머리칼 한 올, 미세한 턱수염, 실제적인 눈동자, 손톱, 발톱까지. 누가 봐도 실제 사람과 하나 다를 바 없는 조각이 보여주는 섬세한 세공력, 치밀한 장인 정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진짜 진정성 있는 울림으로 다가오는 건 극사실적 조각의 완성도를 향한 감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줄을 서 기다린 끝에 보게 된 작품을 대하는 순간, 필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현미경처럼 사실적으로 구현한 작품 속 인물들에게서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게 된다. 더 정확히는 보고 싶지 않게 되는 것인데, 이유는 비교적 분명하다. 치밀한 사실성으로 가득 찬 조각들, 그 사실적인 모습을 이상하게도 우리의 본능이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의 더없이 사실적인 모습은 한없이 아름다운 모성을 담은 눈길로 보는 것과 거리가 멀다. 여자의 무표정은 앞으로 아이와 함께 살아내야 할 삶의 질곡에 관한 본능적인 염려로 채워진 것이었다. 그 무표정에서 우리는 현실을 적당히 포장하고 꿈꾸는 미래 정도로 생각하던 모든 의식이 현실의 부박함 속에서 여지없이 소멸한다는 비극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목격하게 된다. 가장 압도적인 건 안치실에서나 봄직한 두개골을 사람의 머리 크기보다 훨씬 더 과장되게 만들어 수십, 수백개의 해골이 산을 이루며 쌓여 있는 전시였다. 인간의 죽음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혹하게 전시한 작품을 선보인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다 보면 궁극적인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바로 우리가 사는 삶의 현주소가 이렇게 죽은 해골을 떠올리며 사는 인생과 닮아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다.

극사실주의의 효과는 우리네 일상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 애써 보지 않으려는 진짜 현실에 주목하게 한다. 삶은 과장된 슬픔도, 과장된 절망도 없다. 반대로 오늘의 우리는 조금은 과장된 의미나 순화된 감정을 가지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려 한다. 나한테 유리하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수용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눈에 보고 싶은 것, 내 입맛과 코드에만 맞는 것을 찾는 게 한쪽으로 치우쳐 현실을 해석하는 극단적 사실주의라면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나타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극사실주의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감히 극사실주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식으로 현실을 포장하지도, 부러 겁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흐름이 20일이 채 남지 않은 조기 대선을 준비하는 주자들의 공약이 되길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주원규 소설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