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점심이었는지, 저녁이었는지 가물거린다. 첫 휴가를 나온 이등병은 잠에 취해 꿈결인지 아닌지 구분조차 못했다. 그래도 두 가지는 또렷하게 생각난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 밥솥에서 새어 나온 밥 냄새. ‘집에 왔구나. 밥 냄새가 참 달구나.’ 밥 짓는 냄새는 지친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어줬다.
그때와 시공간의 밀도가 달라졌고, 그만큼 밥 한 그릇의 무게는 가벼워졌다. 1976년 정부에서 지정한 식당 공깃밥의 그릇 규격은 지름 10.5㎝, 높이 6㎝였지만 2010년쯤 지름 9.5㎝, 높이 5.5㎝로 줄었다.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994년 20㎏들이 다섯 포대가량(108.3㎏)에서 30년 만에 두 포대 반 수준(55.8㎏)으로 급락했다.
소비량이 뚝 떨어지면서 쌀 생산과잉은 골칫거리가 됐다. 논에 다른 작물을 짓도록 유도했지만, 제대로 감축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공공비축으로 쌀의 수급과 가격을 조절하다 보니 정부 부담은 늘었다. 여기에다 시장·농가 보호를 위해 체결한 외국산 쌀 의무매입 때문에 이래저래 쌀은 넘쳐난다. 이에 정부는 올해 처음으로 ‘벼 재배면적 조정제’를 시작했다. 벼 재배면적 69만8000㏊(2024년 기준) 중 8만㏊를 없애 생산과잉을 해소하고, 적정 쌀값을 유지하겠다는 취지다.
이제 ‘밥 말고도 먹을 게 많으니까’라든지, ‘밥 대신 빵 먹으면 되지’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당연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다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서 산출하는 세계 식량가격지수 같은 숫자들을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조각조각 들려오는 뉴스만 봐도 우리는 ‘풍요 속 불안’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여실히 느낀다. 식량 가격 상승이라는 결과물은 여러 갈래의 뿌리를 두고 자라나는 중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공급망 불안, 원자재 가격 상승, 전쟁, 급변하는 세계 무역정책, 그리고 기후변화.
불안의 징후는 불쑥 이웃 나라에서 고개를 들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쌀을 주식으로 하고, 쌀 자급률이 높은 일본에서 최근 ‘레이와(令和) 쌀 소동’이라 불리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1년 새 일본의 쌀값은 2배로 뛰었다. 유통량 급감을 두고 관광객 증가, 직거래 확대, 1970년부터 시행한 ‘감반 정책’(쌀 생산조정) 부작용 등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긴 시간을 시야에 두고 보면, 감반 정책이 제1 용의자로 떠오른다. 일본의 논 면적은 2023년 기준 124만㏊로 감반 정책 시행 직전과 비교해 60.9%나 감소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또 있다. 잦은 폭염·폭우, 강력해진 태풍 같은 기후변화가 그것이다. 단위 토지당 인구부양력에서 쌀(㏊당 연간 22명)은 밀(14명), 옥수수(19명)를 압도한다. 다만 기온과 물 공급량에 예민하다. 또한 쌀은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레이와 쌀 소동의 원인을 더 깊게 들여다보면, 기후위기와 인구 고령화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일본의 쌀 대란이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식량안보 위기로 번질 수 있음을 얘기하는 대목이다.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해당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일본의 사정이 우리와 100% 같지는 않다. 재배하는 벼 품종의 특성이 다르고, 처해있는 경제·문화·기후·인구 상황도 다르다. 하지만 곱씹을 지점은 많다. 밥 한 그릇의 무게가 달라졌다고 해서 식량안보라는 의미의 무게마저 같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정부 정책은 확고한 원칙 아래 움직여야 하고, 동시에 현실을 적극적으로 담아 탄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 길게 보지 못한 산아제한 정책이 낳은 현재의 풍경이 그걸 말한다.
김찬희 편집국 부국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