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인 사건 없는 보통의 삶
억지로 의미 부여하지 말고
불완전 한 모습 받아들이자
억지로 의미 부여하지 말고
불완전 한 모습 받아들이자
문학을 읽지 않는 친구에게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문학이 지나치게 불행을 편애한다는 것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좋아하는 책을 헤아려보니 모두 불행 잔치다. 문학의 입장은 모르겠지만, 내가 그런 이야기들을 편애하는 건 사실이다. 소수의 편에 서서 세계의 틈을 드러내는 것이 문학의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문학적 전통이 또 다른 배제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을까. 주제 의식이 묵직한 소설 한 권을 펼쳐 두고, 그곳에 없는 것들을 생각한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생활, 변화 없는 감정, 이름 붙일 수 없는 기분, 한마디로 보통의 삶.
자기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의 공통된 고민은 바로 이 ‘보통’이라는 벽이다. 진실과 통찰을 요구하는 문학 앞에 삶이 작게 느껴진다면, 나의 이야기가 서사 바깥으로 밀려난 듯한 기분이 든다면, 우리를 밀어내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통’ 혹은 ‘평범함’ 속에 어떤 함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통계와 관습이 만든 허구적 평균일지 모르는 그 말들 속에는 개별의 복잡성과 고유성이 빠져 있다. 다시 말해 존재를 지우는 납작한 언어가 될 수 있다. 쓰는 사람이 자신을 ‘보통’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자칫 쓸 만한 것이 없다는 자기검열이 시작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소재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보통’에 담긴 비교의 시선과 평가 절하를 걷어내야 삶을 제대로 볼 수 있고, 글쓰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말하는 ‘보통의 삶’을 다르게 바라보는 작가가 있다. 체코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망명한 소설가 밀란 쿤데라다. 그의 소설에는 극적 서사가 없다. 그는 지속과 반복, 누적의 리듬으로 이루어진 삶을 다루고, 그것을 ‘산문적’이라고 말한다. 별일 없이 지나간 하루 끝에 쿤데라의 글을 떠올려 본다. 시간은 어떤 응축도 폭발도 없이 흐르고, 순간은 해석과 의미를 요구하지 않고 지나간다. 그렇다. 이 삶은 확실히 산문적이다.
쿤데라는 산문을 ‘이해의 언어’로 설명했다. 여기서 이해는 삶의 모호함과 모순을 있는 그대로 수용함을 의미한다. 그래서일까. 그가 다루는 삶은 극적인 사건이나 결말이 없고, 어떤 진실에도 도달하지 않는다. 어쩌면 ‘도달’이라는 개념 자체가 삶과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삶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 흐르니까. 우리는 그 뒤를 따르며 무언가를 포착하려 애쓰지만,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완성된 진실이 아닌 진실을 향해 움직였던 흔적일 뿐이다. 그러니 무엇에도 도달하지 않는 것을 쓰는 것은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삶을 증언하는 일일 것이다.
물론 산문적 삶을 쓰는 일에도 훈련과 기술이 필요하다. 쿤데라식 소설 작법에서 힌트를 얻자면, 중요한 것은 관찰하는 눈이다. 반복되는 일상에도 작은 변주가 있고, 그 반복을 뚫고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 관찰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변화 자체가 아닌, 그것이 존재에 일으키는 미묘한 차이를 알아채는 것이다. 알아차리기는 사유의 시작이니까. 미세한 어긋남 혹은 설명할 수 없는 기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자기만의 감각으로 경험한 삶을 쓸 수 있다. 또 다른 중요한 태도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 용기다. 삶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지속이고, 순간은 해석을 요구하지 않고 지나간다. 우리가 그 흐름 속에서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면, 글은 오히려 진실과 멀어질 수 있다.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삶을 정직하게 쓸 줄도 알아야 한다. 정직함은 언제나 그 자체로 훌륭한 서사가 된다.
어쩌면 삶을 쓴다는 것은 이 삶이 반드시 의미로 수렴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직 의미를 찾지 못한 오늘을 써볼 수도 있겠다. 내가 목격한 풍경, 어떤 이의 눈빛, 목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여기, 이곳에 존재하기에 쓸 수 있는 모든 것들. 충분하지 않은가. 이 삶과 이 글은.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신유진 작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