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이어진 미국 민주당 패권
공화당 ‘깅리치 혁명’으로 끝내
지지층 전환과 새 비전 제시에
유권자 신뢰 회복까지 이뤄내
20년 내다보는 장기 전략 없이
한국 보수 정치의 재건 어렵다
공화당 ‘깅리치 혁명’으로 끝내
지지층 전환과 새 비전 제시에
유권자 신뢰 회복까지 이뤄내
20년 내다보는 장기 전략 없이
한국 보수 정치의 재건 어렵다
1994년 9월 27일 미국 하원 공화당 회의는 10개항의 ‘미국과의 계약(Contract with America)’을 발표했다. 중간선거를 40여일 앞둔 때였다.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2년 전 민주당의 압승에도 불구하고 의료보험 개편과 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로 핵심 지지자인 중산층 노동자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공화당은 1952년 이후 42년간 하원 소수당이었던 설움을 만회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하원 원내총무는 뉴트 깅리치였다. 그는 보수의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의 입법·정책 권고안을 대거 반영한 ‘미국과의 계약’을 만들어 공화당 후보 전원인 367명의 서명을 받았다. 의회 출범 100일 안에 균형예산, 감세, 복지개혁, 규제개혁, 범죄 방지, 의회개혁 등을 담은 법안을 발의하겠다는 매우 구체적인 약속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435석 중 176석에 불과했던 하원의 다수당이 됐고, 상원까지 장악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때부터 이어진 의회에서의 민주당 우위가 드디어 무너졌다. 민주당 소속 하원의장 톰 폴리가 낙선해 ‘132년 만의 현직 하원의장 낙선’이라는 이변까지 발생했다.
미국의 보수정치를 말할 때 ‘깅리치 혁명’으로 불리는 이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공화당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부터 대공황까지 70여년 동안 정치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18번의 대선 중 14번 승리했고 의회도 대부분 장악했다. 그러나 오랜 패권은 루스벨트의 등장으로 막을 내렸다. 그는 뉴딜정책 성공을 위해 블루칼라, 흑인, 가톨릭교도와 유대인, 아일랜드계 등 백인 소수인종을 결집해 ‘뉴딜 연합’을 결성했다. 텃밭인 남부지역에 산업화된 도시의 신흥 지지층을 더하면서 선거의 철옹성을 구축했다. 공화당은 의회권력을 완전히 빼앗겼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탄핵과 불명예 퇴진까지 벌어졌다.
공화당은 난국을 혁신으로 돌파했다. 시작은 1964년 대선에서 패한 배리 골드워터의 ‘남부전략’이었다. 북부 대도시 흑인 대신 민주당의 아성인 남부의 소외받는 백인을 포섭한 것이다. 공화당 우익화의 출발점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당장의 대선을 포기하더라도 20년 후를 위해 지지층을 전환하는 결단이었다. 다음은 전통적·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보수의 구축이었다. 반전 시위와 히피 문화의 물결 속에 도덕적 양심의 회복을 최고의 가치로 상정하고, 이를 추구하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을 강력한 지지자로 묶었다. 그 정점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마지막으로 깅리치 혁명으로 신뢰를 되찾았다. 그중 의회의 세금낭비와 권력남용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고, 상·하원 의원 임기를 제한하며, 하원 위원회 소속 직원을 3분의 1로 줄이겠다는 의회개혁 약속은 유권자에게 강하게 어필했다. 새로운 지지층을 확보하고 이념을 재정립하며 유권자의 신뢰를 되찾기까지, 공화당의 혁신은 30년 넘게 지속됐다.
두 번의 대통령 탄핵으로 초토화된 한국 정치의 보수는 어떤 방식의 재건을 준비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다. 낡은 이데올로기 싸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인정하는가. ‘야당의 텃밭’인 수도권에서 벌어지는 유권자의 성향 변화를 감지하고 있는가.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있는가. 유권자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기득권을 버릴 용기는 있는가. 안타깝게도 지금 보수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인 국민의힘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정반대 길로 가고 있다. 조기대선 전략은 빅텐트라는 이름의 ‘반(反) 이재명’ 뿐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명분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는 후보 단일화에는 정치공학적 셈법만 넘친다. 비상계엄 이후 마음이 떠난 중도층을 향한 어떤 메시지도 나오지 않고, 윤석열 전 대통령이 내세웠던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구호 외에는 어떤 비전도 보이지 않는다. 예상대로 대선 후보와 당 지도부의 갈등이 시작됐고, 선거 이후 당권을 염두에 두고 반목한다는 비난을 자초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당장 미래를 준비하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 물론 정당에게 선거 승리는 무엇보다 중요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10년, 20년후를 대비하는 장기 전략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당장의 선거에서 이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외부에서 후보를 영입하고, 내부 권력투쟁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뺄셈의 정치’를 반복할 게 뻔하다. 당장은 힘겹고 고통스럽더라도 바닥부터 다져나가지 않는다면 보수의 재건을 기약하기 어렵다.
고승욱 수석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