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삶을 마른 장작 삼아
창작이라는 불을 지핀 인물
그 의지와 실행력에 경의를
창작이라는 불을 지핀 인물
그 의지와 실행력에 경의를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 하루에 커피를 30잔에서 50잔 정도 마셨다(인간으로서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렇게까지 커피를 많이 마신 이유가 있다. 그는 하루에 소설을 12시간에서 15시간 정도 쓴 것이다(이것도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게다가, 심심찮게 카페에 나가 사람들 앞에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도박도 하고…. 아니, 잠깐만. 정리 좀 해보자.
하루가 24시간인데, 그중 절반 이상을 집필에 쓰고, 또 유흥을 즐기고, 남는 시간에 씻고 커피도 내린다면 대체 잠은 언제 잔단 말인가. 한데, 그의 루틴을 보면 이 삶은 말이 된다. 잠을 잘 시간이 없으니 하루에 커피를 30잔 이상 마신 것이다(때로는 50잔). 아니, 그러면 사람이 죽지 않느냐고? 이 또한 말이 된다. 그래서 그는 51세에 세상을 떠났다. 공식 사인은 심장마비지만, 많은 이들은 그 원인으로 카페인 중독을 꼽는다.
이런 기행에 가까운 삶은 인력(引力)이 강하다. 그리고 그 힘은 10여년 전, 내게 발휘됐다. 그즈음 어쩌면 소설을 왕성하게, 길게 쓰며 살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그때, 발자크가 ‘인간극(La Comédie humaine)’이라는, 말도 안 되는 총서를 기획했다는 걸 알았다. 총 145편에 걸쳐 당대 프랑스 사회를 문학으로 온전히 재현하려는 야심찬 계획 말이다. 이런 야망을 품는 것 자체가 나 같은 범인으로서는 불가능하다. 20세부터 60년간 매해 두 편씩 쓴다 해도 실현 불가능하다. 온전히 이루기는커녕 절반도 해내기 어려울 것 같다. 한데, 발자크는 이 중 91편을 써냈다. 물론 이 또한 그가 51세에 이승을 떠났기에 중단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로 하여금 불꽃 같은 삶을 살게 했을까. 거창하게 말하자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욕구라 할 만하다. 하지만, 좀 거칠게 말하자면 허세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발자크는 자신의 이름을 살짝 개명했는데, 그건 바로 본명 ‘오노레 발자크’에 귀족 가문 출신을 뜻하는 ‘de’(드)를 집어넣은 것이다. 하여, 오늘날 그의 모든 소설은 자신의 바람대로 ‘오노레 드 발자크’라고 인쇄돼 전 세계 서점에 깔려 있다.
그는 또한 죽을 때까지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한림원)의 회원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떨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아울러 그는 사업 실패로 인해 평생 빚에 시달렸는데, 여기에는 그의 사치도 한몫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무엇을 말할까. 어떤 이에게는 실제보다 잘나 보이고 싶은 욕구, 즉 허세가 객기가 창작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발자크의 삶을 들여다본 후 이해한 것은 하나다. 동기야 어떻든 간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삶을 바쳐 실행하는 것이라고. 자신이 세운 목표가 타인의 삶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동기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 실행력이라고. 모티프야 어쨌든 간에 의욕은 누구보다 앞섰고, 그래서 발자크는 끔찍하게도 써냈다.
이 점이 적어도 나에게는 발자크를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아니, 20세기를 통틀어도 없었고, 어쩌면 21세기의 미래까지 빌려온다 해도 그와 같은 작가는 출현하지 않을 것 같다. 대체 누가 자기 삶을 마른 장작 삼아 창작이라는 불을 그토록 활활 지필 수 있단 말인가.
발자크의 삶에 주목한 이유는 비단 내가 소설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시간은 비정하고 성실해서, 몇 년 후면 발자크가 세상을 떠난 나이가 된다. 그래서 종종, 삶의 의욕이 시들해질 때마다 자문한다. 발자크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나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삶의 불씨 정도는 피워봤는가, 하고….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은 더, 빈 원고지를 검게 채워야겠다.
최민석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