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공산주의 ‘갈등의 100년’… 역사 되새기며 미래 열어가야

입력 2025-05-08 03:07
경성 지역 성결교회 소속 주일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1925년 열린 연합운동회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민일보DB

꼭 100년 전인 1925년 10월 21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새문안교회에서는 전국 주일학교연합회가 주최한 대규모 주일학교대회가 열렸다. 수천 명의 학생과 교사가 모여 말씀을 듣고 전도에 참여하는 의미 깊은 행사였다.

조선의 주일학교는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이 12명의 어린이와 함께 시작한 작은 사랑방 모임에서 출발해 불과 30여 년 만에 전국적 운동으로 성장했다. 1913년에는 세계주일학교연합회 회장의 방한에 맞춰 서울에서 1만4000여명이 모이는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22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정식으로 조직된 이후 25년 대회는 그 정점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 경건한 모임은 뜻밖의 사건으로 얼룩졌다. 공산당 청년단체인 ‘한양청년연맹’이 대회에 난입한 것이었다. 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성공 이후 조선에도 공산주의가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을 통해 유입됐고 마침내 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창당됐다. 그 하부조직인 한양청년연맹은 기독교 대회를 공산주의를 선전할 기회로 여겼다.

이들은 새문안교회 안으로 들어와 삐라를 뿌리고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이고 선교사는 제국주의의 주구(走狗·사냥개)”라고 외쳤다. 이어 ‘반기독교 대강연회’를 열어 박헌영이 ‘과학과 종교’를 주제로 강연했고 적지 않은 청중이 몰렸다. 대회 기간 중 곳곳에서 기독교인과 공산주의 청년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조선공산당이 대중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계기이기도 하다.

이 일로 공산주의는 청년 대중 사이에서 주목받게 됐고 기존 기독교가 누리던 정치·사회적 주도권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구한말 이후 유교적 질서가 무너지고 사회적 혼란이 심화하던 시기, 기독교는 청년들에게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했었다. 그러나 3·1운동 좌절 이후 독립의 희망을 잃은 청년들은 공산주의 등장에 큰 기대를 걸며 환호했다.

이 사건은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관계가 처음부터 반목으로 시작됐음을 상징한다. 사실 양측이 대화하고 협력하려는 시도도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20년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기독교 민족주의자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기독교인이면서 사회주의 계열이었던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추대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협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또한 신간회(1927~31)에서 양 진영이 일시적으로 연합하기도 했지만 곧 해체됐다.

20~30년대 조선 독립운동은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뉘었다. 기독교인이 주도한 민족주의 계열은 온건한 방식으로 저항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은 파업과 소작쟁의 등 과격한 투쟁을 전개했다. 일제강점기 내내 공산주의자와 기독교인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간주했고 기독교인은 공산주의를 폭력혁명을 추구하는 무신론 세력으로 여겼다. 35년 공산주의 무장 세력에 의해 ‘만주의 사도바울’로 불리던 한경희 목사가 부흥회 여행 중 피살됐다. 시신은 얼음구멍에 버려졌고 이 사건은 교회에 큰 충격을 줬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김일성 정권이 등장하면서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탄압했고 남한에서는 제주 4·3과 여순사건을 거치며 공산주의자들과 기독교계 사이의 유혈 충돌이 계속됐다.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이 순교한 사건도 여순사건에서였다. 북한에서 가족과 재산을 잃고 내려온 월남자들은 서북청년단을 조직해 무장투쟁에 나섰고 6·25전쟁은 기독교와 공산당의 대립을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전쟁의 트라우마는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했다. 학교에서는 반공, 승공, 멸공이 교육됐고 교회에서는 공산주의를 말세에 나타날 ‘붉은 용’으로 해석했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도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소련 붕괴 이후에도 선거철만 되면 색깔론이 반복되곤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국 교회가 있었다.

공산주의 청년들이 주일학교대회에 난입한 지 어느덧 100년이 지났다. 그날의 충돌은 단순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두 이념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충돌하고 왜 반목하게 되었는지를 되돌아볼 수 있는 상징적 장면이다.

이제는 이 긴 대립의 역사를 돌아보며 새로운 미래를 그릴 때다. 공산주의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경제적 맥락과 변화된 세계정세를 고려해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관계를 재평가해야 한다. 성경은 보수나 진보의 이념을 수호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오늘 한국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 불평등과 불공정에 대해 복음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장동민 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