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테크노 여전사’로 통했던 이정현이 배우를 넘어, 감독 겸 프로그래머로 관객들을 만났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베일을 벗은 그의 단편 영화 ‘꽃놀이 간다’를 통해서다.
이정현이 처음 감독으로 데뷔한 ‘꽃놀이 간다’는 1일 전북 전주시 메가박스 전주객사에서 처음 공개됐다. ‘꽃놀이 간다’는 그가 프로그래머로서 선정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와 함께 상영됐고, 이어지는 ‘J 스페셜 클래스’에서 두 편의 영화에 관해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J 스페셜 클래스’에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출한 안국진 감독도 함께했다.
전주영화제 코리안시네마 섹션에도 초청된 ‘꽃놀이 간다’는 지병으로 죽음을 앞둔 엄마를 위해 마지막까지 고군분투하는 딸 수미(이정현)의 이야기를 그렸다. 1억5000만원짜리 집에 산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어떠한 정책적 지원도 받지 못한 두 모녀는 누적된 병원비를 내지 못해 도망치듯 퇴원해 집에서 지낸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위독해지는 엄마를 보며 수미는 마지막 꽃놀이를 보내주려 한다.
이정현은 “제 첫 작품을 상영하게 돼 참 부끄럽고, 많은 분이 봐주셔서 감사하기도 하다”며 “2년 전 대학원에 진학해 1학기에 촬영했던 영화다. 당시 아들과 엄마가 복지 사각지대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 죽은 일명 ‘창신동 모자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처음 시나리오를 쓴 뒤 안 감독님께 보여드렸는데 너무 못 썼다고 욕도 많이 먹었다. 힘들게 완성했던 영화”라고 웃었다.
‘꽃놀이 간다’는 이정현이 각본과 연출, 연기를 모두 맡았다. 500만원이란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함께 작업했던 박찬욱 감독, 연상호 감독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연 감독의 스태프들을 찾아가 영화 제작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정현은 “새벽에 촬영을 끝내고 집에 와서 너무 힘들어 울기도 했다. 그래도 완성작이 나오니 보람차고, 함께 일한 스태프들에게 참 감사하다”고 돌아봤다.
이날 ‘꽃놀이 간다’와 함께 상영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가수로 각인돼있던 이정현을 배우로 인식시켜준 작품이다. 이정현은 이 작품으로 청룡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삶에 찾아오는 불행을 피해 갈 수 없는 현실을 잔혹하고도 유머러스하게 짚어낸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와 한국 사회 구조의 모순을 담아낸 ‘꽃놀이 간다’는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이정현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도, ‘꽃놀이 간다’도 사건의 기저에 부동산 문제가 있다”며 “안 감독님이 제 롤모델인데, 그래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이정현은 현재 다른 단편 영화도 제작 중이다. 그는 “다음 달에 단편 영화를 또 찍는다. 지금은 시나리오 완성 단계”라며 “그 영화도 사회적 문제에 관한 이야기다. 다음 영화는 ‘꽃놀이 간다’보다 더 잘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응원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이정현은 영화제 기간 자신이 프로그래머로서 선정한 ‘복수는 나의 것’(2002), ‘꽃잎’(1996), ‘파란만장’(2011) 등 6편의 영화를 통해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전주=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