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회를 이어가기 위해 목사 안수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받았다. 마침 동역자들과 민동 언니(모 은행장의 아내)의 지원을 받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미국에 공부하러 다녀오는 동안 ‘동교중앙교회’를 맡아줄 담임목사로 장모 목사를 교인들에게 추천했다. 장 목사는 삼각산에 있었을 때 나와 아이들에게 따뜻한 수제비를 나눠주던 목회자였다. 아이들은 무료 야간진료소 시절부터 도움을 준 희야와 민동 언니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 도착한 나는 신학교 입학에 앞서 먼저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내 삶을 돌아보며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했다.
석 달쯤 지났을까. 성도들로부터 장 목사가 교회를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오랜 산중 생활로 사람들과의 관계나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담임목사 없이 남은 성도들을 돌봐야 했기에 풀어놓은 옷가지를 다 입어보지도 못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협성대 신학대학원(현 협성대학교 웨슬리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교회 사역과 학업으로 바쁜 어느 날, 대학생선교회(CCC) 박모 목사가 찾아왔다.
그는 “서울 여의도에서 전국 CCC대회를 열어야 하는데 정권의 제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도움을 청했다. 당시는 종교 모임조차 철저히 통제받던 시기였다. 알아보니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측근 중에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3사관학교 교회 설립을 내게 요청했던 A장군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군님을 그 자리에 세우신 건 하나님께서 이때를 위해 쓰시려는 뜻입니다. CCC가 여의도에서 행사를 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주십시오.”
“시간을 좀 주십시오.”
다행히 CCC대회는 여의도에서 무사히 열릴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A장군은 “이 집회는 시위가 아니라 나라를 위한 청년들의 기도 모임”이라며 3일간 설득해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냈다고 한다.
CCC는 행사 당일 강대상에 내 자리를 준비했지만, 나는 조용히 행사만 확인하고 자리를 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고 나는 그저 쓰임 받은 도구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대그룹에 입사해 정주영 회장을 보좌하던 한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CCC에서 활동 중이라던 청년은 막혔던 여의도 행사가 열리게 된 것을 보고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기업인 모임도 정치적 통제로 크게 제약받고 있으니,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현 한국경제인협회)의 문이 다시 열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그는 “경제가 무너지면 군도 나라도 소용없다”고 나를 설득했다. 그의 말에 동의한 나는 A장군에게 전했고 A장군은 이번에도 “사업 논의와 해외 진출을 위한 모임”이라며 일주일간 대통령을 설득해 허락을 받아냈다.
기업인 모임이 재개된 날 전경련에서 드려진 감사예배에 나는 설교자로, A장군은 기도자로 섰다. 예배 후 정주영 회장이 “감사하다”며 봉투를 내밀었지만, 나는 그대로 테이블에 두고 나왔다. 그것 역시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 내가 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