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쪽지] 제3자는 없다?

입력 2025-05-03 00:31 수정 2025-05-03 00:31

철학에는 ‘제3자 퇴행 논변’이라는 것이 있다. 모두가 제3자라고 인정할 사람이 없어 자꾸 새로운 제3자를 요청하게 된다는 소리다. 설명이 조금 복잡하니 사례로 생각해 보자. 어느 부부가 “길을 막고 물어봐 누가 당신처럼 말하나?”라며 싸우다 정말 길을 막고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부부가 길거리에서 만난 C에게 상황을 설명한다. 상황설명을 들은 C가 “아내분 말씀이 맞는 것 같은데요”라고 하면 남편은 C에게 “길막힘 당한 그대, 그대의 말이 진실이오”라고 할까. 아마 남편의 대사는 “내 마누라만 이상한 줄 알았더니 여기 이상한 사람이 또 있네”일 것이다. 그다음에 온 D가 듣더니 “남편분 말씀이 맞는데요”라고 하면 아내는 D의 말이 맞는다고 할까. “남자라고 남자 편 드시는 거예요?”라며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을 제3자로 인정하지 않고 자꾸만 제대로 된 제3자를 데려오라며 볼멘소리를 하게 된다는 것이 제3자 퇴행 논변이다.

제3자 퇴행 논변은 우리로 하여금 제3자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이 맞는다고 할 사람이 ‘제3자’로 올 것을 기대한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연히 제3자라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해당사자 양쪽이 모두 만족해하는 제3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현실의 사회에서는 이 제3자를 절차적으로 결정해 놓는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회구성원 간 분란을 조정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이 제3자에 해당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 이 사례의 경우에 부부싸움 내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부터 남편과 아내가 다시 싸울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한쪽이 부부싸움의 내용을 설명하면 다른 한쪽은 “이 사람이 사람을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네! 내가 언제 그랬어?”라고 볼멘소리를 하게 된다. 남편이 사태에 대해 설명하면 그 설명은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유리한 설명이 되고, 아내가 사태를 설명하면 그 설명은 아내에게 유리한 설명이 될 수밖에 없다. 이해당사자 양쪽이 모두 용납하는 ‘사태의 객관적 기술’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 자기객관화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뇌과학자인 정재승 교수는 ‘자기객관화는 가장 고도의 사고능력’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말을 들으며 ‘그게 바로 철학에서 하고자 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인데…’라는 생각을 했다. 자기객관화를 하려면 자신의 생각이 정당하다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고 자신의 생각을 검토해볼 줄 알아야 한다. ‘내 생각은 나에게만 정당해 보일 수도 있다’를 생각하지 않으면 객관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진다. ‘나는 객관적인데 다른 사람들이 객관적이지 않아서 괴롭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어느 누구도 객관적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자기중심적 편향은 제거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박은미 철학커뮤니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