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에 떠오르는 모성애
사회가 엄마 역할 나눠가져
‘삶의 주체’ 여성상 병립해야
사회가 엄마 역할 나눠가져
‘삶의 주체’ 여성상 병립해야
5월이 왔다. 부모 사랑과 자녀 사랑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쏟아질 때가 된 것이다. 하지만 ‘가정의 달’로 구별해 기념해야 할 만큼 가족은 우리를 취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너무 친밀해 너무 아픈 일들이 발생한다. 가족은 우리를 살리기도 하지만 우리를 ‘어렵게’ 살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사람을 변호하는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바로 ‘엄마’다. 가부장제라는 낡은 제도는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에게도 역할의 버거움을 부여한다. 하지만 인류의 지식이 절대다수 남성 학자에 의해 생산되었다는 면에서 나는 책으로 배운 ‘엄마다움’의 지식에서 내 20년 엄마 생활이 자꾸 빗겨나감을 느낀다.
한때 필독서로 꼽혔던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엄마다움, 즉 모성애를 “어린아이의 생명과 욕구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이라고 했다. 엄마와 자녀의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맺어졌든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라고도 했다. 좋은 엄마라면 비이기적인 사랑으로 아이에게 희생을 선택할 것이기에 자녀 우위의 불평등 관계일 것이며, 나쁜 엄마라면 자아도취적인 이기적 사랑으로 아이를 지배할 것이기에 엄마 우위의 불평등 관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진정한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을 얻기 위해서는 이기성을 버리고 이타적인 존재가 되는 길밖에 없다. 타자의 철학으로 유명한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아예 모든 윤리적 사랑의 원형으로 ‘모성애’를 지목했다. 그는 엄마란 마치 수난당하는 메시아처럼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아이의 부름에 “나 여기 있어(me, voici)”라고 외치며 전적으로 책임지는 존재라고 했다. 모성을 “절대적 수동성”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은 엄마의 사랑을 숭고하게 칭송하는 남성 학자들의 말을 의심해 왔다. 엄마를 가장 숭고한 존재로 격상시키는 신화 속에는, 여성은 누구나 아기를 낳고 키우는 ‘자연적 본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이중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의 지적처럼 진짜 엄마들이 경험하는 엄마 생활은 그렇게 숭고하지 않다. 내 배 아파 낳은 아이, 내 마음으로 낳은 아이가 보통은 너무 이쁘고 사랑스럽지만 때때로 내 삶을 중단시키고 내 존재 자체를 전복시킬 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로 다가오기도 한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마리 퀴리는 임신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상황이 변하자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그토록 사랑한 ‘라듐’ 같은 건 생각조차 못하고 그저 먹고 자면서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어진 자기 자신에게 너무나 실망한 것이다. 아주 잠시였지만 아이를 낳으려고 한 선택을 후회하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젖을 주는 행위는 여성만이 할 수 있기에 자연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여성이라고 해서 그 모든 일을 그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어느 순간도 100% 자연인으로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자 문화적 존재이며 기술적 존재다. 그러니 여성이 엄마가 되어도 여전히 자기 삶에 대한 욕망을 가진 향유 주체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9년 전 한국 사회를 강타한 ‘82년생 김지영’은 향유 주체로서의 여성이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일시적 혹은 장기적으로 겪게 되는 모성 일탈 경험을 담아냈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며 꾸중했다. 하지만 김지영들의 말은 희생을 더 이상 안 하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들도 엄마의 절대적인 수동적 사랑 없이 아이가 생존할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안다. 다만 그 책임 앞에 자기 삶을 향유하고 싶은 욕망이 교차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사랑의 책임이 무한하다는 말보다 사랑으로 인한 갈등이 무한하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선언에 가족과 사회가 지금 보다 더 진지하게 응답해야 한다. 21세기 인류는 엄마가 아닌 이들도 엄마 역할을 나누어서 질 수 있는 기술과 제도를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
김혜령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