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생존이 위협받는 시대의 낭만

입력 2025-05-02 00:38

음악을 디지털 음원이 아닌 카세트테이프나 CD, 그보다 전에는 LP로 감상하는 게 일반적이던 시대가 있었다. 손때가 묻은 물건을 ‘소장’하는 게 낭만인 시절이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사면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크기의 가사집을 들고 다니며 가사를 외웠다. 너덜너덜해진 카세트테이프나 CD의 속지를 훈장처럼 보관했다.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영화가 많아지자 소장할 게 늘었다. 상영 날짜와 시간, 장소, 영화 제목, 가격이 적힌 영화 티켓을 차곡차곡 모았다. 영화표를 하나씩 들춰볼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영화표를 붙이고 영화에 대한 감상을 쓰는 다이어리도 있었다. 영화를 소개하는 팸플릿이 극장에 쌓여 있었고, 집에 가서 버릴지언정 하나씩 챙기는 건 당연했다. 옛날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소장에 욕심내는 건 이제 유지해선 안 되는 낡은 태도가 됐다. 더 많은 사람이 더 오래 살아남아 문화를 즐기고 추억하기 위해 추억할 수 있는 물건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 하는 시간이 왔다.

얼마 전 내한한 콜드플레이는 친환경을 내세운 공연으로 화제를 모았다. 공연장에 생수 페트병 반입을 금지하는 대신 멸균 종이 팩에 든 생수를 판매했고, 다회용기를 가져가 물을 담아 마실 수 있도록 음수대를 준비했다. 관객들이 발을 구르면 전기가 생산되는 키네틱 플로어(움직이는 바닥)와 파워 바이크를 공연장 내에 설치해 공연에 사용되는 전력을 만들어냈다.

관객들은 응원봉을 드는 대신 친환경 소재로 만들어진 자이로 밴드를 팔목에 찼다. 자이로 밴드는 공연이 끝나면 회수해 다음 공연에서 재사용됐다. 매 공연 시작 전 국가별 회수율을 공개하는 방식은 한국 팬들의 올바른 경쟁심에 불을 질렀고, ‘회수율 99%’라는 세계 최고 기록을 만들어냈다.

콜드플레이의 공연은 ‘문화의 강력한 힘은 이런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재미 요소를 통해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고 취지에 공감하게 만드는, 더할 나위 없이 긍정적인 방식이었다. 이들이 꾸준히 환경에 대한 생각을 밝혀 왔기에 더욱 설득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콜드플레이는 2016~2017년 월드투어에서 탄소 배출량이 250만t에 달했다는 분석이 나오자 2019년 투어 중단을 선언했고, 2021년 탄소 배출량을 절반 이상 줄이겠다고 약속하며 투어를 재개했다.

국내 대중문화계에서도 환경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점점 활발해진다. 플라스틱 소재 응원봉과 공연장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포토카드를 갖고 싶어하는 팬들이 플라스틱 앨범을 대량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마케팅 방식이 탄소 배출량을 증가시키는 탓이다. K팝 팬들로 구성된 기후행동단체 케이팝포플래닛은 지난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2025 음악 지속가능성 서밋’에서 “죽은 지구에 K팝은 없다”고 외쳤다. 가수 루시드폴은 2023년 앨범 ‘비잉 위드’를 발매하며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플라스틱 음반이 공해가 되는 건 사실”이라며 “(생분해성 소재를 사용해) 언젠가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는 LP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극장의 모바일 티켓에는 여전히 정이 가지 않는다. 여러 가수의 음악이 뒤섞인 스마트폰 속 플레이리스트를 보다보면 최애 가수의 음반을 CD플레이어에 넣고 한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 훨씬 ‘의리’ 있었던 듯도 하다. 하지만 위기에 빠진 지구를 생각하면 나 혼자 간직하는 낭만은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며 안일하다. 지속 가능성을 통해 더불어 생존하는 데서 낭만의 의미를 찾아야만 하는 때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임세정 문화체육부 차장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