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미뤘던 일본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공부가 될 만한 영상을 찾아봤다.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 줄거리가 너무 재미있으면 안 된다. 서사의 재미를 따라가다 보면 잘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대충 지나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둘째, 네 살 정도의 아이가 말하는 것처럼 문장이 짧고 쉬워야 했다.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 프로그램은 ‘나의 첫 심부름’이라는 일본 다큐멘터리였다. 이전에 봤던 터라 시즌 2부터 보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다섯 살 남자아이 켄이다. 켄은 야키소바와 빵을 사러 첫 심부름을 나선다. 엄마는 아파트 베란다로 나와 켄이 건널목을 잘 건너는지 지켜본다. 그사이 켄이 빈손으로 돌아온다. 다양한 소바 중에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도에서 켄은 또 빈손으로 돌아온다. 켄은 번번이 난관에 부딪힌다. 거스름돈을 바닥에 흘리고, 빵 집게도 떨어뜨린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를 하나씩 해결한 켄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온다.
그렇게 심부름 성공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장면이 나왔다. 꽤 인기 있는 장수 프로그램이라 이후 이야기가 추가된 것이다. 17년 뒤 카메라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정비소에 취직해 정비사로 일하는 켄을 비춘다. 이어 켄이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간 장면을 보여준다. 켄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의 어머니는 투병 중에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화면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안 보일 때까지 베란다에서 켄을 지켜보는 엄마를 비춘다.
순식간에 이 가족의 서사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에 일본어 공부는 실패로 돌아갔다. 기억나지 않아도 누구나 겪었을 생애 첫 심부름. 누구나 앙증맞고 가느다란 두 발로 세상의 문을 열고, 용기를 낸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자식을 품 밖으로 보낸 어머니도 작은 이별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