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컬처 아이] 국립중앙박물관이란 무엇인가

입력 2025-05-01 00:38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쓴 대선 후보가 있었다. 시대착오적 행보였지만 그는 대통령이 됐다.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다 탄핵됐다. 돌이켜보면 민주공화국에서 그런 후보가 대통령에 뽑혔다는 것 자체가 문제적이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인식이 국민들에게 내면화됐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국민 정서 형성에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여한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최근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하는 ‘조선 민화(民畵)전’(6월 29일까지)을 취재하면서 문득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민화전은 또 다른 민간 미술관인 삼성 호암미술관에서 1983년부터 여러 차례 꾸준히 해 왔다. 국립기관 중에선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가장 최근 2006년에 전시를 한 적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민화 전시를 한 적이 없다. 박물관의 ‘왕’인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민화 전시를 해서는 안 되는 ‘금기’라도 있는 걸까. 민화 연구자 J씨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그동안 민화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민화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민화를 문인화에 비해 격조가 낮은 그림이라는 의미로 속화라고 불렀다. 그런 인식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버드 출신의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한국회화사’에는 민화의 ‘민’자도 나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서울대는 국립중앙박물관 인력 양성소 역할을 했다. 엘리트주의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를 관통하는 것이다.

박물관은 전시를 통해 담론을 생성하고 대중의 생각까지 움직인다. 지배자들이 ‘미술 정치’를 하는 이유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박물관 전시를 통해 ‘조선은 미개, 일본은 근대’라는 인식을 유포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국내 최고 기관인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는 중요하다. 그 자체가 상징이자 메시지,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민화 전시가 없는 이유를 상설 전시실 구성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실’만 보더라도 왕과 문인 사대부 등 지배층 유물을 보여준다. 왕의 상징인 ‘일월오봉도’에서 시작해 구한말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로 끝을 맺는다. 양반가를 대표하는 ‘청풍김씨’ 가계도도 있지만 평민까지 향유했던 민화는 없다.

이곳에서 일했던 J씨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고자 한다”면서 “하지만 사대부 그림이나 도화서 화원 그림만 인간의 미술 활동이라고 할 수 없다. 민화에 나타나는 원초적인 표현 방식도 한국 미술사 전체를 보여주는 과정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민화 전문가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은 “18세기 들어 상업이 발달하면서 평민도 민화를 사서 집안을 꾸몄다. 이전 같으면 평민이 그림을 산다는 건 꿈도 못 꿨다”며 “그런 점에서 민화는 평등이 실현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민화가 표상하는 시대정신은 말하자면 평등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에서 민화가 빠짐으로써 우리는 은연중 지배자 중심의 의식을 강요받은 건 아닐까. 미국 미술이론가 더글러스 크림프는 “푸코의 설명에 들어맞는 또 하나의 감금제도가 있으니 그것은 미술관과 미술사라는 규율”이라고 주장했다. 거의 모든 박물관이 승자와 엘리트의 시각에서 역사를 서술해 왔지만 이에 대한 반성이 일고 있는 추세다. 소외되었던 원주민의 역사를 다루는 박물관 전시가 등장하는 것이 그런 예다.

아모레퍼시픽 전시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빌려준 민화 3점이 나왔다. ‘이건희 컬렉션’인 호랑이와 토끼 그림도 있었다. 민중을 상징하는 토끼가 영리하게, 권력층을 상징하는 호랑이가 바보처럼 그려져 저항과 해학이 넘친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이건희 컬렉션에서 기증 받은 민화가 200여점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컬렉션까지 갖췄으니 민화 전시가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