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유출되기 전 내가 흘린 정보

입력 2025-05-03 00:38

바쁘다는 핑계로 수년째 만나지 못했던 친구 A가 다음 주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왜 떠나는지도.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영국으로 떠난 지인 B는 최근 현지 취업에 성공했다.

축하할 일이지만 살갑게 축하 메시지를 보낼 사이는 아니다. 그와는 만나기는커녕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받은 지도 오래됐다.

그래도 아는 수가 있다. 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덕분이다. 이들의 계정을 주의 깊게 본 것도 아니다. 모든 일상을 중계하듯 알리니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최근 챗GPT 이용자들은 셀카나 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린 뒤 장소를 맞혀보라고 하는 질문을 하는 일종의 놀이를 한다. 지하철역 앞이나 광화문광장 등 누구나 알 만한 장소가 아니어도 근처 식당이나 편의점 등을 통해 챗GPT가 장소를 추정하는 것이 신기해서다.

그렇다면 내 사진 몇 장만 가지고도 이동 동선을 추적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악의를 가진 사람이 이 기술을 범죄에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출근길 SK텔레콤 대리점에서 길게 늘어선 줄을 봤다. 가입자 유심(USIM) 정보 일부가 유출되면서 유심을 모두 교체해야 해서다. SK텔레콤은 해킹 공격으로 가입자 정보를 탈취당하고도 관계 당국에 부실한 내용으로 늑장 신고했다.

대중에게 알린 것은 SK텔레콤이 해킹을 인지한 지 사흘 뒤였다. SK텔레콤은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겠지만 가입자 반발에 유심 전면 무상교체를 결정했다.

또 유심보호 서비스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해킹 피해가 발생하면 회사가 전면 보상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조처가 고객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고객들은 지금도 빠르게 이탈 중이다.

여러 기업이 가입자 정보를 무책임하게 유출해 한국인 개인정보는 공공재가 된 지 오래됐다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가입자들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다.

일부는 SK텔레콤을 상대로 소송할 계획도 갖고 있다. 정부 차원의 처벌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개인정보가 그만큼 중요해졌다. 금융거래는 물론 각종 서비스 가입과 탈퇴, 민방위 훈련 인증도 개인정보로 한다.

하지만 불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의 개인정보는 길에 널려 있었다. 공중전화에 놓인 노란색 전화번호부 책에 개인의 이름과 집 주소, 전화번호가 빼곡히 실렸다. 지금은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때는 문제가 안 됐다. 우리의 인식이 그랬다.

인스타그램이 4월 11일 ‘친구 지도’ 서비스를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인스타그램 친구에게 알릴 수 있는 기능이다.

사진과 그 아래에 구구절절 쓰는 글에 이미 상당한 정보가 공개되는데, 이제는 실시간으로 위치까지 공유되는 것이다. 아파트에 거주한다면 몇 동에 있는지도 파악된다.

처음 이 기능을 접한 뒤 나는 전화번호부 시절로 돌아가는 섬뜩함을 느꼈다. 서로를 감시하게 하는 이 기능에 충격을 받았지만 10, 20대를 중심으로는 활발하게 사용되는 기능이라고 한다.

인간은 SK텔레콤의 유심 유출에는 분개해 소송을 준비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정보를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알리는 상반되는 선택을 하는 존재다. 여기에 대단한 이유는 없다.

우리가 외로움을 느끼는 인간이어서다.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누군가 내가 찍어 올린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줬으면, 그리고 “어디인지 알려 달라”고 물어봐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극히 인간 본능적인 욕구다. 숫자가 그렇다고 말해준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갖고 있는 기업 메타의 시가총액은 약 1994조원이다. 이 기업 하나의 시총이 코스피 기업 전체 시총의 합(약 2088조원)에 근접한다.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기분에 개인정보를 스스로 흘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온라인에서 나를 어느 수준까지 드러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본격화될 것 같다. 개인정보를 팔아 외로움을 해결하는 우리의 모습이 처량하기도 하다.


이광수 경제부 기자 g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