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의 삶을 ‘기록된 순간들’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유년기의 긴 그림자는 좀처럼 말해지지 않는다. 말이 없다고, 기록되지 않았다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터. 침묵 속에는 말보다 깊은 이야기가 숨 쉰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를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신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서력(AD) 역시 정확한 계산이 아니다. 그 달력을 고안한 ‘작은 디오니시우스’의 착오 때문이다. 아기 예수는 AD 1년에 태어나지 않으셨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실제 탄생은 기원전 4~6년. 헤롯이 BC 4년에 죽은 것이 결정적 단서다.
그렇다면 AD 1년은 예수께서 여섯 살쯤 됐던 해다. 역사의 모든 착오와 상처는, 그 여섯 살 예수의 눈으로 다시 읽힐 수 있다. 그 무렵 요셉과 마리아는 애굽 피난을 마치고 나사렛으로 귀향하고 있었다. 서력의 첫해, 그 주인공의 삶은 이주와 경계, 귀향의 기억으로 얼룩져 있다.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기억하지 못하셨을까. 헤롯의 광기 속에서 스러져간 아이들, 애굽으로 피난했던 그 사연을. ‘기억하지 못했을’ 거라 우리는 쉽게 말하지만 하나님 아들의 로고스는 사무친 기억조차 무의식의 심연 속에, 인류의 슬픔과 함께, 깊이 껴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라다가 자기로 인해 고향에서 벌어진 그 사건을 처음 듣던 날 소년은 얼마나 목놓아 울었을까. C S 루이스의 말처럼 “사람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것을 가장 부끄러워한다”는데. 기억나지도 않는 그날의 죄, 그 피비린내 나는 탄생의 대가. 이 모든 것을 소년은 어떻게 그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 속에서 견뎌냈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어째서 헤롯의 끔찍한 악행과 그로 인한 상처마저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목에 놓으신 걸까. 대죄마저 쓰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 역설 안에 구속이 움튼다. 망각 위에 세운 삶의 설계는 결국 거짓에 머물기 쉽다. 그러나 예수는 고향의 기억을 외면하지 않는 진실을 선택하셨다. 열두 살 성전에서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며 드러난 자기 현존재에 대한 인식의 만개는, 어쩌면 여섯 살 무렵 마음 깊은 곳에 피었던 봉오리의 향기였는지도 모른다.
성경은 떠남과 귀향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이스라엘 백성도 떠났다가 결국 돌아왔다. 고뇌 속에 문득 떠오른 아버지 집의 추억. 여섯 살 예수의 귀향 역시 단지 이 땅의 고향 너머, 하늘 아버지의 집을 향한 첫걸음 아니었을까.
아버지를 기억하고, 그를 향해 작은 발걸음을 내디디며, 결국 자기 온 생애로 그를 드러내는 천로역정. 사람은 누구나 바로 그 역정 위에, 누군가 저지른 크나큰 실수의 시간 위에 서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긋남과 착오조차 경이롭게 사용하신다. 역사의 실수는 은혜의 무대가 되고, 존재의 허무는 영원의 통로가 된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자비가 저를 불러 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평생 고백이다. 소년 예수의 유년 시절처럼. 장편 ‘소년이 온다’에서 한강 작가는 다짐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소년 예수가 오월의 햇살 아래 이 땅을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기도한다. 이 땅의 오월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걷는 길의 시작과 끝에 감춰진 잃어버린 고향일지도 모른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그 한 가지 기억만으로도. 오늘, 우리는 다시 그 길을 걷는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눅 15:20)
송용원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