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계 수직적 문화, 폐쇄성 탓… 열린 선수촌 만들 것”

입력 2025-05-02 00:00 수정 2025-05-02 00:00
김택수 신임 진천국가대표선수촌장이 지난 23일 충북 진천국가대표선수촌 집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 촌장은 “선수와 지도자가 서로 존중하는 열린 선수촌 문화를 조성해 한국 체육의 전환점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진천=윤웅 기자

한국 체육은 2024 파리올림픽에서 총 32개의 메달을 수확했다. 지속된 엘리트 체육의 위기설 속에서도 기대 이상을 성과를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선수단의 선전에도 한국 체육의 수직적·폐쇄적 문화에서 비롯된 각종 병폐를 고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았다.

올해 출범한 유승민 회장 체제의 대한체육회는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국가대표 총괄 임무를 부여받은 김택수 신임 진천선수촌장도 이런 기조에 발맞춰 ‘개방된 선수촌’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탁구 국가대표 선수와 지도자, 협회 행정 등 그간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달라진 선수촌 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각오를 전했다. 지난 23일 진천국가대표선수촌에서 김 촌장을 만났다.

-막중한 책임에도 선수촌장을 맡은 이유가 뭔가.

“취임사에서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문화를 바탕으로 투명하고 공정한 운영을 통해 모두 함께 성장하고 소통하는 열린 선수촌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선수와 지도자를 합쳐 24년간 국가대표 생활을 했다. 시대가 변하는데 선수촌은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게 늘 압박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선수촌 문화를 바꾸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지만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건 아니었다. 선수와 지도자, 행정직원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다. 서로가 존중하고 칭찬하는 관계를 맺어야 함께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무거운 책임감도 느끼고 있지만 다 함께 힘을 모으면 변화가 어렵지 않을 거라 본다.”

-열린 선수촌의 목표와 기대 효과는 무엇인가.

“선수와 선수, 선수와 지도자 간 수직적 문화는 결국 폐쇄적인 선수촌이 만든 결과물이라 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음성적으로 답습하지 말아야 할 문화가 이어져 왔다. 지금보다 선수촌이 개방되면 자연스레 사라질 것으로 본다. 선수촌장실도 24시간 열려 있다. 취임 직후 제 책상을 가로막고 있던 칸막이부터 없애버렸다. 지도자는 물론 선수와도 터놓고 소통을 많이 하려고 한다. 선수들의 훈련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가족이나 연인, 친구, 미디어를 초청하는 이색적인 행사도 기획 중이다. 진천선수촌은 세계 최고 수준의 시설로 평가받는다. 선수촌이 대중에게 먼저 다가가 친숙해지려는 노력도 할 것이다. SNS 영상 홍보나 굿즈 사업을 준비 중인 이유이기도 하다. 최상의 선수촌에서 운동하는 우리 선수들이 국가대표라는 자부심을 갖고 각자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선수촌장 취임 후 한 달이 지났다. 훈련 방식에 어떤 변화를 줬나.

“아침 운동에 자율적으로 참여하도록 방침을 바꿨다. 각 종목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운동하도록 변화를 줬다. 그래도 참여도가 높다. 선수들이 스스로 운동하려는 의지와 눈빛을 보여주고 있어 기대가 크다. 억지로 운동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스스로 필요성을 깨닫고 목표를 정한 뒤 훈련을 해야 한다. 다만 종목별 훈련은 선수들과 타협하지 말라고 지도자들에게 당부했다. 한계를 넘어서는 훈련만이 결실을 맺는다고 믿는다. 단순히 국가대표들에게 메달만을 바라는 시대도 아니다. 메달이 없어도 근성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 자체로 박수를 받을 수도 있다. 이런 모습도 결국 훈련을 통해서만 나온다고 생각한다.”

-자율성을 부여한 만큼 선수들의 동기부여가 중요할 것 같다.

“취임 후 태릉선수촌과 같은 ‘명품 선수촌’을 만들어달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태릉 시절엔 훈련 환경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훈련장은 늘 땀 냄새에 찌들어 있었다. 선수들의 가슴엔 선수촌에 입성하겠다는 간절함과 뜨거움이 있었다. 인재가 인재를 키운다고들 하는데, 선수와 가장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할 지도자들이 많이 위축돼 있어 사기 진작책을 고민하고 있다. 요즘은 선수마다 개성과 스타일이 워낙 다르니 똑같이 다루려고 해선 안 된다. 선수 성향에 따라 당근과 채찍을 들어야 한다. 소통이나 훈련 방식도 선수마다 달리 가져가야 한다. 천편일률적인 훈련만으로 선수들을 설득할 수 없는 시대다. 심리 케어, 과학적 트레이닝 분석 등 객관화된 지표도 적극 활용해야 할 것 같다. 결국 선수들에게 확실한 동기부여를 줄 수 있는 환경과 문화를 만드는 게 선수촌장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종목·선수별 맞춤형 훈련 방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100% 동의한다. 세계랭킹 1위와 20위, 스무 살과 서른 살 선수가 다 같은 훈련 방식과 부상 관리를 한다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수들이 최상의 경기력을 내도록 돕는 게 선수촌의 역할이 아닌가. 규정에만 얽매여서 모두가 같은 방법으로 운동해선 안 된다. 이미 경기력 차별화를 보여준 선수들에게 기초 훈련만을 강조하는 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프로 종목은 개인 트레이너, 후원 등 지원을 상대적으로 많이 받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메달 종목 중엔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종목도 많다. 불세출의 스타들이 기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유연함도 필요하다.”

-선수촌의 활용도를 높여야 한다는 의견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동안 선수촌은 성인 국가대표만 이용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청소년 선수들에게도 개방해 훈련하거나 견학할 수 있는 장소가 돼야 한다. 청소년 선수들이 선배들과 직접 경쟁을 하거나 선배들의 훈련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새로운 꿈을 갖는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 일부 종목은 1년 중 일부 기간만 선수촌에서 훈련을 한다. 메달 종목뿐만 아니라 비인기·비인지 종목에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파리올림픽에서 메달을 많이 땄지만 근본적으로 체육 개혁이 이뤄졌느냐는 질문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결국 한국 체육계 전체가 성장하려면 미래를 이끌 선수들이 계속 나와야 한다. 복싱, 레슬링, 하키, 핸드볼 등 전통이 있는 강세 종목들의 부활도 필요하다.”

-선수촌장 임기가 끝났을 때 어떤 얘기를 듣고 싶나.

“김택수가 변화를 줬다는 얘기를 듣고 싶다. 선수와 지도자, 행정 직원들에게 열심히 일한 선수촌장이였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당장 내년 2월에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이 열린다. 사실 제게 화려한 기록이나 메달 개수는 크게 중요치 않다. 그래도 2022년 베이징 대회 때보다는 메달이 하나라도 더 나왔으면 좋겠다. 제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를 이끈다면 성적도 알아서 따라올 거라 본다.”

진천=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