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정전과 유심 해킹의 역설

입력 2025-05-01 00:40

한낮에 벌어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지난 28일 정전 사태는, 전기 없이는 옴짝달싹 못하는 초연결 사회의 민낯을 드러냈다. 지하철은 멈췄고, 신호등이 꺼진 도심의 도로는 아수라장이 됐다. 현금 없는 카드 보유자들은 슈퍼마켓에서 찬밥 신세가 됐다. 벽돌로 변해버린 스마트폰 속 소셜미디어는 침묵했다. 정보에 목이 마른 사람들은 아날로그 라디오를 켠 이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 한동안 잊고 살았던 여유가 피어났다. 어떤 이는 햇살 가득한 광장에서 기타 연주를 즐겼고, 누군가는 나무 그늘 밑에서 책장을 넘겼다. 디지털 디톡스가 강제되자 사람들은 비로소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서로를 바라보며 얘기꽃을 피웠다.

비슷한 장면은 한국에서도 연출됐다. SK텔레콤 유심 해킹 사건으로 2500만명에 이르는 가입자들이 패닉에 빠졌다. 금융정보는 물론 개인의 일상까지 휴대전화 속에 집약된 시대, 유심칩 하나가 해킹되자 사람들은 대리점 앞에 길게 줄을 섰다. 그런데 정작 유심 재고는 100만개 남짓. 수요는 천문학적인데 공급은 바닥났다. 그 혼란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금융 손실과 정체성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로 퍼졌다.

우리는 지금 전기를, 데이터를, 연결을 더 갈망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인공지능 산업을 선도하겠다며 원자력 발전 추가 가동은 물론 화석연료까지 마구 채취하겠다고 한다. 데이터 센터는 도심 외곽에 우후죽순 들어서고, 전기차는 최첨단을 뽐내며 달린다. 우리는 1879년 에디슨의 백열전구가 불을 밝힌 덕에 밤을 쫓아냈지만, 그 대가로 불면증과 비만을 얻었다. 전기의 편리함에 고요와 어둠이 가진 회복의 힘을 잃어갔다. 불이 꺼지자 우리 삶은 되레 잠시나마 빛났다. 그 빛이 얼마나 깊은 그림자를 품고 있었는지도 발견했다. 전기는 삶의 동력이지만, 삶의 본질은 전기 없이도 가능했던 그 조용한 오후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또래들과의 유쾌했던 놀이와 촛불 아래 고즈넉한 식사처럼.

이동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