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 야간진료소(이하 진료소)를 사직하고 나니 내 시간은 멈춘 듯했다. 이제는 갈 곳도 나를 불러주는 이도 없었다. 진료소 사역을 하던 동안 아이들을 돌봐주었던 희야와 민동 언니만이 여전히 나를 챙겼다. 희야는 화곡제일교회 시절부터 내 곁에서 도와준 젊은 여성이었고 민동 언니는 모 은행장의 아내였다.
나는 어느 한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채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도는 순례자가 됐다. 내가 진정 쉴 수 있는 곳은 오직 삼각산뿐이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만 마음의 평안과 고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초저녁에 삼각산에 올라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곤 했다.
진료소를 떠난 지 1년쯤 지났을 때 삼각산에서 서원했던 ‘일곱 교회를 세우겠다’는 약속이 떠올랐다. 나는 인천의 복음교회, 화곡제일교회에 이어 세 번째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0·26 사태가 일어났다. 청와대 관계자가 집으로 전화해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전했다. 곧이어 라디오와 뉴스를 통해 세상에도 비보가 전해졌다. 나를 깊이 신뢰해 주었던 분의 죽음에 나는 삼각산에 올랐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역사는 쉼 없이 흘러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뒤따랐다. 나라는 제5공화국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어느 날 동교동교회를 담임하던 박모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동교동교회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됐다며, 현재 자리에 교회를 개척해 보라는 제안이었다.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3층짜리 건물의 1층엔 전자제품 대리점이, 2층은 치과병원을 비롯한 다른 사무실이 입주해 있었고, 교회는 3층 전체를 전세로 사용하고 있었다.
민동 언니는 망설이는 내게 필요한 돈을 마련해줄 테니 건물을 매입하라고 했다. 건물주는 북에서 내려온 분의 후손들로 각각 사업체 사장과 학자, 바둑기사였다. 이들은 처음에 1억원을 제시했고 나는 500만원을 깎아 9500만원에 계약을 맺었다. 건물 1, 2층 전세가 있었던 터라 큰돈은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신용이 좋아야 했는데 은행장 아내인 민동 언니의 연줄 덕분에 건물 매입이 가능했다.
집을 팔아서 처음 집 살 때 받은 융자금을 갚고 남은 3000만원으로 서울 마포구 연남동 철길 옆 연립주택에 월세로 들어갔다. 그리고 남은 돈을 종잣돈 삼아 은행에서 추가 대출을 받았다.
진료소에서 십원짜리 하나 착복한 적 없었지만, 청와대에서 나와 건물을 샀다는 소문이 퍼질까 두려웠다. 고민 끝에 동교동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던 내 대학 후배 부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후배 남편의 명의로 교회 건물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마쳤다.
복음교회 교인들이 찾아와 개척을 도왔고 독립문에서 인연을 맺은 교인들도 힘을 보탰다. 그러나 진료소에서 내가 숱하게 도움을 주었던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았다.
교회 이름도 정해야 했다. 위치가 동교동 삼거리 근처였기에 중앙이라는 뜻을 담아 ‘동교중앙교회’라고 정했다. 그렇게 세 번째로 세워진 동교중앙교회는 1981년 4월 부활절에 개척 예배를 드렸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