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시간을 넘어 전통으로, 도움과 연대로

입력 2025-04-30 00:33

‘형평운동’ 이끈 백촌 강상호
그의 정신 살린 김장하 선생
시간을 넘어 그렇게 이어진다

지난 늦가을 잡지를 만들기 위해 경남 진주를 다녔다. 불과 두어 달 후에 갑자기 나라를 뒤흔들 비상계엄 사태가 터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던 때였다. 당시 가장 큰 걱정거리는 마감일이 지나기 전 남강과 촉석루 일대에 보기 좋게 단풍이 들 것인가였다. 강가에 앉아 건너편 진주성을 바라보면 어째 나뭇잎이 조금 붉게 물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진주에 대한 잡지를 만든다고 하니 많은 분들이 김장하 선생을 지면에 다루길 원했다. 하지만 몇 군데 수소문하니 도저히 쉽게 인터뷰에 응할 것 같은 분은 아니었다.

마음이 급했던 나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쌓아놓고 읽어 내려갔다. 진주의 문화와 역사를 다룬 여러 책의 머리말에는 ‘연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신 김장하 선생께 감사드린다’는 말이 등장했다. 그 이전에도, 이후로도 그렇게 많은 연구자가 앞다퉈 같은 인물에게 감사를 표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잡지를 만드는 일은 비교적 수월했다. 김장하 선생의 도움을 받은 학자들이 숱한 옛 문헌을 뒤지고 발로 답사해서 만든 소중한 책과 논문들 덕택이었다. 그러므로 나와 독자들 역시 선생의 도움을 받은 셈이다.

‘갚으려거든 사회에 갚으라’고 거듭 강조했다는 김장하 선생이 길러낸 수많은 장학생에게 배우거나 도움을 받은 이들은 얼마나 많을까. 한 명의 오롯한 인간은 얼마나 많은 이들의 힘이 되는 것일까. 몇 번 찾아가 졸라보기라도 했다면 이렇게 아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잡지를 만들면서 진주의 오래된 시간에 새겨진 아름답고 기이한 모습을 보았다. 예를 들어 진주에는 한국 최초의 보편적 인권운동이자 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 운동인 형평운동이 있었다. 천석지기 양반가의 아들 백촌 강상호를 비롯한 진주의 엘리트들이 연대해 ‘저울(衡)처럼 평등(平)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백정들과 함께 싸웠다.

1920년대 진주교회는 백정과 양민이 함께 예배를 보고, 그 자녀들을 가르친 최초의 교회였다. 날품팔이로 시작해서 자수성가한 구한말 여성 부호 ‘꼼쟁이 할매’ 김정 부인은 간장이 아까워 소금밥을 먹는 구두쇠였지만 여학생도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며 진주보통학교에 거금을 내놓아 최초의 남녀공학을 만들었다.

전통이 단지 오래됐기 때문에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조선에는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가혹한 적서 차별이 있었고,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도 강했다. 스물 몇 살 때 ‘토지’를 읽으며 오래된 것을 모두 미워하기로 마음먹은 적이 있다. 작가 박경리가 생생하게 묘사한 백정에 대한 차별이 너무나 참혹했기 때문이다.

천민이라는 이유로 그런 폭력과 모욕을 당해야 하는 세계에 다소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해도 과연 그것을 취할 필요가 있을까. 잡지를 만들며 봤던 진주의 역사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제공한다. 약한 이를 돕고 연대해 함께 의지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해도, 옳지 않다면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말고 바꿔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용기야말로 그저 흘러가는 오래된 시간에 ‘전통’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형평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강상호는 1957년에 세상을 떠났다. 갑부였던 부친의 명의로 가지고 있던 모든 빚문서를 불태웠고, 재산을 사회운동에 아낌없이 헌납했기에 가진 것이 없었다. 장례식 날에는 전국에서 백정 출신 인사들이 홍수처럼 몰려들어 슬피 울었고, 진주 시내에서 장지까지 만장을 든 사람들이 이어졌다.

40여년 후 어떤 이가 버려진 강상호의 묘를 정비하고 작은 비석을 세웠고, ‘모진 풍진의 세월이 계속될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선생님이십니다. 작은 시민이’라는 글귀를 새겼다. 비석을 세운 그 ‘작은 시민’이 바로 김장하 선생이다. 도움과 연대는 시간을 넘나들며 그렇게 이어진다.

김현호
사진비평가
보스토크 프레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