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브라질 상파울루 외곽 빼냐교회에서 집회를 가졌다. 그동안 한국을 떠나 필리핀 이집트 케냐 앙골라 사역을 이어오면서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래서 별 준비 없이 교회에 갔는데 천상의 찬양이 들려왔다. 저녁예배인데도 꽉 들어찬 성도들이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예배와 찬양을 하고 있었다. 주님의 강력한 임재와 찬란한 빛의 흐름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토록 예배에 집중하며 강력한 기대감을 가진 청중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 필자는 몸이 지친 데다 준비 없이 말씀을 전했다. 파워포인트(PPT)까지 문제가 생겨 통역하는 선교사님의 열정이 그나마 집회를 살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의도한 것과 다르게 선교 헌신에 대한 메시지가 주를 이루게 됐다. 마지막 기도를 마치고 내려왔는데 그 교회 빅토르 목사가 선교사로 헌신할 사람을 초청하는 게 아닌가. 놀랍게도 상당수 청년이 앞으로 나와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내던져진 말씀 진리의 파편도 주님이 쓰시면 이렇게 효과가 있음을 깨달으면서 필자는 철저한 자기부정과 낮아짐을 체험했다.
브라질은 인구 2억2000만의 대국이다. 이 중 30%가 거듭난 크리스천일 정도로 엄청난 부흥 속에 있다. 선교의 열기도 대단해 최근 선교사 10만명 파송을 이루며 한국을 제치고 세계 2위 선교 대국으로 우뚝 서 있다. 전도 운동을 주도하는 300명의 사역자 콘퍼런스에서 만난 지도자들은 모두 친절하고 헌신적인 기도의 용장들이었다.
50대 중반의 깔리또 목사는 필자가 최근 만난 대형교회 목사 중 가장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분이었다. 그의 교회는 출석 성도 3만명에 육박하는 브라질 최대 교회 중 하나로, 질적 차원에서 저절로 감탄이 나오는 총체적 전도 시스템과 승법 번식의 플랫폼을 가진 공동체였다. 그는 지혜로 똘똘 뭉친 영적 거인이었고 그의 동역자들도 열정적이었다.
브라질은 이미 수십만 개의 교회가 존재하는 기독교 대국이었고 모든 종류의 사역과 선교 활동이 꽃피고 있었다. 특히 브라질의 국민성은 밝고 친절하며 사교적이고 낙천적이어서 전도나 선교, 긍휼 사역에 적합해 최고의 선교사 자원이다. 그래서 빌리온 소울 하비스트(BSH) 본부에서는 브라질 리더들에게 브라질이 세계적으로 100만 선교사 운동을 주도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브라질은 또 도시 빈민이 수천만일 정도로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이기도 하다. 세계 1위 총기 살인을 기록할 정도로 범죄가 많고 치안이 불안한 데다 인구 3분의 1이 심령술사를 찾는 무속적 성향, 번영신학과 영적 지도자의 스캔들 등 많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브라질의 가장 큰 국가적 난제는 한국과 비슷하게 정치 불안에 있다. 보수와 진보가 번갈아 집권하는 양상과 50:50의 치열한 대립이 유사하다. 양 진영이 포퓰리즘을 보이며 확고한 원칙이 없는 것, 극한적 투쟁 양식을 보이는 것도 한국과 유사하다.
브라질은 광활한 영토와 거대한 인구, 엄청난 자원을 가진 나라로 정치만 제대로 하면 비약적 성장을 할 수 있는 나라이다. 특히 현재 정권을 잡은 진보의 룰라 대통령은 이미 부패 혐의로 한번 쫓겨난 경력이 있는데 암 투병까지 이겨내며 다시 당선돼 이른바 불사조라 불린다. 비교적 청렴했던 보수의 보우소나르 전임 대통령은 현재 정권 탈환을 노리고 있다. 이처럼 보수와 진보가 번갈아 가며 집권하는 것은 롤러코스터를 타듯 불안해 보이지만 그나마 주어진 상황에서 부패를 최소화하는 게 최선의 길이다.
주목할 것은 이런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과 혼란에도 하나님의 부흥은 멈춘 적이 없다는 점이다. 브라질 교회는 보수나 진보 정권과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사실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 직전인 1907년, 3·1운동 이후인 1920년대에 위력적인 성장이 있었고 유신정권 말기인 70년대 초반 폭발적 성장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국가적, 정치적 불안기에 교회 부흥을 이뤄낸 것이다.
사실 정치적 안정을 위해 기도하거나 한쪽 편이 집권하도록 기도하는 것은 응답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정치 현실을 초월해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경우는 응답받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어떤 상황에서도 영혼 구원을 위한 기도는 응답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필자는 10억 영혼 구원 운동을 통해 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평화를 위해 기도하지 말고 추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외친다.
요즈음 마음 아픈 것은 교회 성도들까지 보수, 진보로 나뉘어 대립하는 현상이다. 자기 민족을 사랑했던 사도바울이 로마서 9장 1절에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라고 한 표현이 이해가 간다. 다들 생각이 너무 많다. 그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보수는 ‘절대 가치의 사수’라는 차원에서 일부 성경적이고, 진보는 ‘공평과 정의’라는 차원에서 일부 성경적이다.
나라가 건강해지려면 건강한 보수와 건강한 진보가 공존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제 세상 나라에 관심을 덜 두고 하나님 나라에 더 집중할 때라는 것이다. 이 모든 갈등을 한 방에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 부흥의 불길이 북녘땅을 뒤덮고 온 세계로 번지도록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과부처럼 불퇴전의 기도가 합심으로 드려져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끝까지 궁금했던 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정치적 회복’(행 1:6)이었다. 예수님은 그러나 답변을 유보하시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셨다. 역사적으로 모든 부흥은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합 3:2)
KWMA 회장·사랑의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