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인도 등 무역 협상 속도전
‘더티 15’ 첫 언급하며 힌트 주고
트럼프 폭주엔 가드레일 역할도
SNS에 협상 소식 부지런히 띄워
‘더티 15’ 첫 언급하며 힌트 주고
트럼프 폭주엔 가드레일 역할도
SNS에 협상 소식 부지런히 띄워
지난 24일(현지시간) 오전 8시 미국 워싱턴DC 펜실베이니아대로 재무부 청사 앞. 백악관과 나란히 붙어 있어 늘 관광객이 붐비는 거리지만 오전 이른 시간 탓인지 비교적 한산했다. 하지만 건물을 둘러싼 철제 가드 앞에는 한국 기획재정부 공무원들과 워싱턴특파원 등 취재진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이날은 한국과 미국이 상호관세를 두고 처음으로 ‘2+2’ 통상 협의를 한 날이었다. 협의 시간은 1시간20분 정도에 그쳤고 탐색전 성격의 첫 협의였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크다 보니 관심이 집중됐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이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 추진에 있어 최고 실세로 부상하면서 각국 협상단이 베선트 장관 앞으로 몰려들고 있다. 관세 협상의 주무 부처는 원래 미국무역대표부(USTR)다. USTR은 자유무역협정(FTA)과 세계무역기구(WTO) 분쟁 대응, 관세 정책 등을 전담한다. 트럼프 집권 1기 때도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당시 USTR 대표가 관세 협상을 주도했다.
그러나 트럼프 2기 들어서는 재무부가 관세 정책의 핵심 부처로 등장했다. 재무부는 금융 정책과 환율 문제를 담당하는 부처로 원래 무역 협상의 주인공이 아니지만,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가 통상 협의를 하기 위해 재무부를 찾고 있다. 한국보다 먼저 관세 협상을 한 멕시코와 유럽연합(EU) 대표단도 베선트를 만났다.
한·미 첫 협의에는 최상목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베선트와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가 나섰다. 하지만 회의는 베선트가 주도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협의 뒤 “한국이 최고의 안을 가지고 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 외교 소식통은 “일본 협상단도 트럼프의 호출로 백악관에서 면담했지만 애초에는 재무부 청사에서 관세 협의가 예정돼 있었다”고 전했다.
베선트는 한국, 일본, 인도 등과의 관세 협상에서 ‘속도’를 강조하며 협상을 이끌고 있다. 친트럼프 언론으로 알려진 뉴욕포스트는 관세 협상과 관련해 “베선트와 트럼프가 운전석에 앉아 있고,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과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고문이 계속 접근하는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베선트는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옹호하면서도 과격한 관세 레토릭을 매끈하게 다듬어 시장의 불안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 27일 ABC방송 인터뷰에서 트럼프의 관세 정책 변덕에 대해 “게임 이론에선 이를 ‘전략적 불확실성’이라고 부른다. 협상 상대방에게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미리 알려주지 않는 것이 좋다”며 “트럼프만큼 이런 지렛대를 만드는 데 능숙한 사람은 없다”고 설명했다. 무질서해 보이는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합리적인 이론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베선트는 지난주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회의에서도 트럼프 행정부가 ‘강달러 정책’을 유지하겠다고 강조하며 달러화 약세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좌충우돌하는 트럼프의 관세 폭주에 ‘가드레일’ 역할도 한다. 베선트의 ‘입’을 보면 트럼프의 발언도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다. 트럼프는 최근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을 해임할 수 있다며 격한 어조로 비난했는데, 며칠 뒤 해임할 의도가 없다고 말을 뒤집었다. 이를 두고 미국 언론들은 베선트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조하며 트럼프를 설득했다고 전했다.
또 트럼프가 최근 중국과의 관세 협상을 강조하고 있는데, 베선트는 “145%의 대중국 관세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먼저 중국과의 ‘빅딜’을 언급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지난 2일 상호관세를 발표하기 전에 ‘더티(dirty) 15’를 언급하며 관세 향방의 힌트를 준 인물도 베선트다. 그는 지난달 18일 트럼프 행정부 인사 중 처음으로 ‘더티 15’라는 표현을 쓰며 한국과 중국 등 미국에 막대한 무역 적자를 안긴 국가들이 상호관세의 표적이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실제 베선트의 예고대로 트럼프의 상호관세는 ‘더티 15’에 집중됐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좌우하면서 베선트가 실세 중의 실세로 부상했다는 점은 트럼프의 최측근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와의 충돌에서도 확인된다. 베선트와 머스크는 지난 17일 백악관에서 국세청장(IRS) 직무대행 임명 문제를 두고 “꺼져라” 등의 욕설까지 주고받으며 싸웠다. 애초 머스크가 추천한 게리 섀플리가 청장 대행으로 임명됐지만, 두 사람의 충돌 이후 섀플리는 사흘 만에 경질되고 베선트가 천거한 마이클 포켄더가 청장 대행에 임명됐다. 그만큼 베선트의 권력이 커진 것이다. 트럼프의 ‘1호 친구’라고 평가받았던 머스크는 5월부터 정부효율부(DOGE) 업무를 크게 줄이고 테슬라 경영에 집중하기로 했다.
베선트는 최근 소셜미디어에 각국과의 관세 협상 소식을 부지런히 업데이트하고 있다. 그는 한 게시물에서 “우리에게 와라. 관세를 철폐하고 비관세 무역 장벽을 없애고 환율 조작을 중단하고 노동과 자본에 대한 보조금을 중단하라”며 “그러면 우리는 대화할 수 있다”고 적었다. 본인 스스로가 미국의 관세 정책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공표한 것으로 해석된다.
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