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건축, 분쟁, 보조금 문제 등 각종 부탁을 들고 찾아오는 목회자들은 초라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 삼각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내가 필요해 찾아온 이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지자체 기금 등을 활용할 방법을 찾거나 교회를 도울 직원들을 보냈다. 교회를 위해서라면 내 이름도 기꺼이 내주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찾아오던 이들을 대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우쭐하던 마음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아버지는 그들의 처지를 헤아려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며 돕고 “내가 가진 것은 모두 내 것이 아니다”라고 가르치셨다. 나 역시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목회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1977년 1월 새마음갖기운동본부가 무료 야간진료소(진료소)를 인수해 서울 동대문구에 경로병원과 경로한방병원을 개원했다. 같은 해 12월 구국봉사단은 해체됐고 1976년부터 임의단체로 활동하던 대한구국여성봉사단이 사단법인 인가를 받아 이듬해 초 근혜(박근혜 전 대통령)가 총재로 취임했다. 진료소 역할이 빠진 봉사단에선 기존에 중책을 맡았던 목사들이 대부분 떠났다. 나 역시 계속 활동할지 결단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진료소 활동을 시작했던 건 위기에 처한 나라에 작은 힘이라도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나라가 약하면 국민이 희생한다”는 말도 잊히지 않았다. 힘들어도 내 일처럼 진료소 업무에 임했고, 숨이 막힐 듯한 일이 생기면 역시나 삼각산을 찾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진료소를 나가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따르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 저는 지금 이 일이 너무 즐겁습니다. 저를 때리고 쫓아낸 남편도 TV로 보고 있을 텐데 왜 나가라고 하십니까.’
아쉬움과 원망이 뒤섞인 울부짖음에도 하나님은 “지금 나가야 네가 산다”는 답을 주셨다. 하나님의 뜻을 더는 거역할 수 없어 결국 떠나기로 결단했다.
떠나기 전 나는 유력 정치인에게 최태민에 대한 우려를 전했다. 이 일로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나 역시 조사를 받았지만 혐의는 받지 않았다. 당시 조사를 맡은 책임 검사는 오히려 아파트 하나 못 챙긴 나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사직서를 맡기고 사무실을 나왔다. 다음 날 직원들이 사직서를 들고 찾아왔지만, 다시 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집으로 전화가 무수히 걸려왔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두고 삼각산으로 올랐다.
삼각산에서 내려온 뒤, 진료소 직원에게 그동안 진료소 일을 도와준 여성 선교회원들의 명단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미 누군가 모두 가져갔다고 했다.
그날 오후 집에서 쉬는데 누군가 도둑처럼 몰래 집에 들어왔다. 군화처럼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소리치자 “여기 계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달아났다. 내가 비밀자료라도 가지고 나왔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난 그 집을 팔고 떠났다. 그렇게 뉴스와 신문에서 멀어지며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