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러시아 파병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 지난해 10월 파병 사실이 알려진 이후 반년만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러시아로부터 높은 수준의 파병 대가를 얻어내기 위해 참전을 공식화하며 이를 국제사회에 알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했고 러시아는 필요할 경우 북한에 군사원조를 제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북한 노동신문은 28일 1면에 조선노동당 군사위원회의 서면 입장문을 싣고 “로씨야(러시아) 연방에 대한 우크라이나 당국의 모험적인 무력침공을 격퇴하기 위한 꾸르스크(쿠르스크) 지역 해방작전이 승리적으로 종결됐다”고 밝혔다. 신문은 “국가수반의 명령에 따라 작전에 참전한 우리 무력 구분대들은 높은 전투 정신과 군사적 기질을 남김없이 과시했다”며 이번 파병이 김 위원장의 지시라는 사실도 공개했다.
김 위원장은 “정의를 위해 싸운 그들은 모두가 영웅이며 조국 명예의 대표자들”이라며 “우리 수도에는 곧 전투 위훈비가 건립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수의 사상자 발생 사실을 인정하며 ‘보상’을 공언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쿠르스크 탈환을 선언하는 성명을 통해 김 위원장에게 감사를 표하며 “영웅적 행동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북·러는 파병이 지난해 6월 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이 맺은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에 따른 것이라며 정당성을 강변했다. 특히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조약에 따라 필요 시 북한에 군사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며 “특별군사작전(우크라이나전) 경험을 통해 러시아와 북한 간의 조약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하는지 알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북·러가 파병을 공식 인정한 건 북한군 파병 사실이 알려진 지난해 10월 이후 6개월 만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1만1000여명의 병력을 러시아로 보냈으며, 4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그간 내부 동요 등을 염려해 파병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러시아가 쿠르스크 탈환에 성공했다는 ‘명분’을 만든 시점에서 북한은 파병을 더 숨길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향후 러시아의 군사적인 반대급부를 확보하기 위해서 공개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향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담판까지 염두에 둔 포석으로도 풀이된다.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 국면이 펼쳐질 때 러시아와의 긴밀한 협력 관계임을 강조해 협상력을 높이려 한다는 얘기다. 러시아라는 ‘뒷배’가 있는 만큼 북한이 대미 협상에 목맬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도 해석된다.
북한과 러시아가 파병을 공식화한 만큼 양측이 협력 강화를 위한 추가 행동에 나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러 간에 경제협력뿐 아니라 군사 분야에서의 협력이 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장 다음 달 9일 러시아 전승절을 전후해 김 위원장이 러시아를 찾아 정상회담을 열 가능성도 거론된다. 다만 현재까지 김 위원장의 방러 동향은 포착되지 않았다.
구병삼 통일부 대변인은 “아무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자 해도 북한군 파병은 국제규범을 어긴 불법적인 행위”라고 지적했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도 “북한 스스로 범죄행위를 자인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준상 기자 junwit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