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026학년도 의대 정원을 증원 이전 수준으로 되돌렸지만 의·정 갈등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의대 증원은 도로 0이 됐고, ‘윤석열 학번’으로 불리는 25학번 의대생 교육을 비롯해 의대 교육 현장은 정상적으로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다. 전공의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들의 공백으로 인력 운용 한계에 부딪힌 지역 병원부터 무너질 것이란 우려가 들린다.
1년3개월이 넘도록 한국 사회는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의대 증원을 주도한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대통령실과 보건복지부는 무력해졌다. 당장 의대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부가 총대를 멨지만 국면을 수습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의료계는 정부의 의료개혁을 실패로 규정하고 연일 거침없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지난 20일 ‘전국 의사 총궐기 대회’에서 김창수 의협 정책이사는 “정부는 의료 현실을 전혀 모른다. ‘조선반도 문과 DNA’만으로 삼라만상 모든 지혜가 내 책상 위에 있다는 오만함으로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고 했다. 앞서 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이 한 강연에서 “조선반도는 입만 터는 문과 X들이 해 먹는 나라”라며 정부를 비난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이를 보면 결국 의사 생리나 의료 현장을 모른 채 정부가 나서서 문제라는 게 의사들의 인식인 듯하다.
대선 국면에 접어들자 의협은 의료정책 주도권을 쥐겠다며 대화 상대 고르기에 나섰다. 김택우 의협 회장은 “대선 기간 제시되는 보건의료 공약이 또 다른 의료 개악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정책 주도권을 확보해 나가겠다”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언급한 공공의대 설립에 대해서도 대응 방안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과연 의협은 의료정책을 주도할 자격과 준비가 돼 있나.
의협이 의료정책의 주도권을 쥐려면 가장 먼저 의료계 내부의 대표성을 확보하고 의료계가 동의하는 안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전공의, 봉직의, 개원의, 의대생과 대학교수의 처지가 다르다. 병원도 상급종합병원과 2차병원, 일반 개원가의 상황이 천차만별이다. 오죽하면 지난 20여년간 의·정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의료계는 단 한 번도 단일안을 도출한 적 없다는 얘기가 나올까. 실제로 의협은 이번에도 전공의나 의대생의 목소리를 대표하지 못했다. 의대 증원 규모에 대해서도 정부안을 반대하는 것 외에 통일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정책 입안 과정의 전문성까지 갖추진 않더라도 의료 문제를 정책으로 풀어낼 전문가 집단이 준비됐는지도 미지수다. 그동안 의료계에선 한국 의사들처럼 여론에서 고립된 집단이 없다며 우군이 돼줄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여전히 의사 사회의 현실과 그들이 바라보는 의료계의 문제를 공적 언어로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해주는 전문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뭐니뭐니 해도 의료정책의 핵심은 어떤 경우든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고 지키는 일이다. 그 막중한 책임감이 결국 정책 추진의 동력이다. 하지만 이번 의료대란에서 우리는 언제든 환자를 떠날 수 있고, 의료계 결속을 위해서라면 동료를 향해 비상식적 방법을 동원하는 의료인을 봤다. 무능한 정부만큼이나 의사도 믿기 어려운 존재가 됐다. 의료정책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협의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 마음이 불안하고 심란한 이유다.
의·정 갈등은 주도권 다툼이나 힘겨루기로 해결할 수 없다. 의사와 정부 누구도 승자가 될 수도, 돼서도 안 된다. 의료 공급자인 의사와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 양쪽이 각자의 권한과 한계를 인식하고 머리를 맞대는 것 말곤 해법이 없다. 그 답을 모두가 알지만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김나래 사회부장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