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등 농산물 제값 받도록 도움의 손길… ‘가난한 농부들의 등대’로

입력 2025-04-29 03:06
이철용(왼쪽) 목사가 지난달 26일 필리핀 타를라크 CAMP의 정미소에서 도정 기계를 가동하고 있다.

별빛이 사라진 필리핀 타를라크(Tarlac)에 푸른 새벽빛이 번지기 시작한 건 오전 6시 무렵이었다.

클락국제공항에서 북쪽으로 35㎞ 정도 떨어진 이 시골 마을 숙소에서 늦잠을 잔다는 건 사치였다. 한낮 기온이 섭씨 40도 가까이 올라가다 보니 이른 아침부터 출근하는 직원들의 발걸음이 이방인을 깨웠다. 멀리서 개가 짖는가 싶더니 풀을 찾아 헤매는 말의 콧바람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지난달 26일 ‘타를라크 캠프(CAMP)’는 이처럼 부지런히 하루를 열었다.


아시아빈곤선교센터(Center for Asian Mission for the Poor)의 영문명 앞 자를 따 만든 조어가 바로 CAMP다. 2007년 이철용(62) 선교사가 마닐라 마가티에 처음 설립한 CAMP는 이후 불라칸을 비롯해 타를라크, 다바오 등 필리핀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가난한 이들의 ‘땅라우(Tanglaw)’가 되고 있다. 타갈로그어인 땅라우는 등대를 의미한다.

루손섬 중북부에 있는 타를라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바탄 죽음의 행군’의 목적지로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이곳은 여전히 빈곤이라는 상대와 싸우고 있다.

농사에 기대 사는 이들은 유통업자들의 횡포와 기후위기 한복판에서 신음하고 있다.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이런 이들의 친구로 살기로 다짐한 이 선교사가 타를라크에 CAMP를 세운 건 2017년이었다.

“사탕수수 최대 산지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주민들이 손에 쥐는 건 정말 푼돈에 지나지 않으니 안타깝죠. 농산물 시세도 제대로 모르니 중간 상인들이 모든 걸 좌지우지합니다. 오랜 세월 삼모작 하던 마을이 기후변화로 겨우 한 번 추수하게 된 것도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 선교사의 말이다. 그는 이어 “우리가 이분들의 이웃으로 든든히 서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면서 “추수한 농산물을 적정 가격에 판매할 수 있도록 돕고 농산물을 가공해 추가 수익을 내는 걸 이들 스스로 하도록 돕는 게 나와 우리 팀이 하는 선교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마침 추수한 벼를 가득 실은 승합차가 정미소 앞에 멈춰섰다. 시간당 300㎏을 처리할 수 있는 정미소의 도정 기계는 인근에서 유일하게 현미 도정이 가능하다. 냉장고 보급률이 떨어져 튀김 요리가 많은 식문화 때문에 고혈압 문제가 심각한 필리핀에선 현미가 인기라고 했다. 이날 벼를 싣고 온 주민도 현미를 찧기 위해 왔다고 전했다. 조용했던 오후를 흔드는 기계의 굉음과 쌀겨 냄새가 묘하게 조화를 이뤘다.

한 주민이 도정을 마친 현미를 들어보고 있다.

이 선교사는 “이렇게 현미로 찧으면 중간 상인을 거치더라도 제값을 받고 팔 수 있어 주변에서 인기가 많다”고 했다. 정미소 근처엔 필리핀식약청 허가를 받은 식품 가공 센터도 있다. 이곳에서는 두부나 누룽지, 심지어 김치까지 만드는데 농가 수익 창출의 효자 역할을 하고 있다. 타를라크와 불라칸 CAMP에 있는 식품 가공 센터에서 만드는 가공 식품은 필리핀에 사는 한인뿐 아니라 부유한 필리핀 사람들에게도 건강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미 마가티에서 친환경 식료품점 ‘올가’도 운영하고 있다. 올가는 CAMP의 자체 브랜드다.

마닐라 마가티에 있는 올가 매장 앞에서 직원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건축 자재를 만드는 공장에선 청년들의 꿈이 자라고 있다.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시작한 공장은 앞으로 건축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할 방침이다. ‘물집(water house)’은 주민들의 ‘건강 사랑방’과도 같다. 상수도 시설이 없어 깨끗한 물을 마시기 어려운 주민을 위해 CAMP가 설치한 정수 설비로 항상 청정수를 공급하는 마을 우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던민다나오대학교 토양연구소와 함께 농산물 생산성을 최대 30%까지 높일 수 있는 토양 개선제도 만들어 보급하고 있다.

마을 레스토랑은 역점 사업 중 하나다. 한식을 비롯해 이탈리아 음식까지 다양한 식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레스토랑을 구상 중이다. 최근 포스코 청암상을 받은 이 목사가 상금 1억원을 기탁하면서 준비하던 여러 사역이 발 빠르게 진행될 전망이다.

이쯤 되면 CAMP는 등대를 넘어 필리핀 다음세대와 지역 사회를 깨우는 불씨와도 같다. 이 같은 획기적인 성과는 우리나라 해외 원조의 모델로도 꼽힌다. 이날도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 관계자들이 이곳 시설을 견학하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찾아왔을 정도다.

필리핀을 향한 이 선교사의 사랑은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 마련으로 이어졌다. CAMP에서 17㎞ 떨어진 타를라크주립대 대학가에 지난 1월 ‘카페 커먼 그라운드’를 열었다. 150㎡(45평) 넓이의 카페는 흡사 우리나라 대학가에 있을 법한 세련된 인테리어가 눈길을 끌었다.

이 선교사는 “빈곤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려면 청년들이 꾼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면서 “이 카페가 필리핀의 희망찬 내일을 열어가는 놀이터가 되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선교사는 건물 2층도 임대해 젊은이들이 창업을 할 수 있도록 공유사무실로 꾸미고 있다.

그러면서 “필리핀 대학생들은 영어도 잘하고 명석하다. 이 빌딩에서 제2, 제3의 일론 머스크 같은 세계적인 기업가가 나올 걸 믿는다”면서 “세상을 바꾸는 리더십이 샘솟길 바라고 기도하며 앞으로도 필리핀에 사랑과 복음을 심고 싶다”고 전했다.

타를라크(필리핀)=글·사진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