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전 세계를 상대로 무차별적 관세 폭탄을 던지자 소셜미디어(SNS)에는 다양한 풍자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츠)이 쏟아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상징과도 같은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빨간 모자를 눌러쓴 몸집 큰 미국인이 어둡고 좁은 공장에서 재봉틀로 옷을 만들고 스마트폰을 조립하느라 진땀을 빼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성조기 하나 못 만드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라며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미국을 조롱하는 영상을 누군가 만들어 퍼트린 것이다. 중국산 성조기 등 웃음 속에 감춰진 쓰디쓴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하지만 현실 속 제조 현장에는 웃음기 없는 신음이 가득하다. 지방 소재 중견기업 A사는 자체적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린 결과 간신히 적자를 면할 수 있는 관세 마지노선이 9% 수준인 것을 확인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미국 현지 공장의 생산 비중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25% 관세 부과가 현실화할 때는 버틸 여력이 없다는 게 경영진의 냉정한 판단이다. 다른 중견기업 B사는 야근을 없애고 정시 근무 체계로 전환하며 인위적 감산에 돌입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90일 동안 유예한 상호관세 부과 전까지는 생산량을 줄이고 재고를 소진하는 식으로 버텨보겠다는 것이다. B사 경영진은 “유예 기간이 끝나고도 25% 관세가 유지되면 산업 생태계는 끝장나는 걸로 봐야 한다”고 우려했다.
관세는 파는 사람이 아닌 사는 사람이 지불하는 게 관례인데, 이를 우회하는 수입상의 움직임은 이미 포착됐다. 수출 기업 C사는 미국 거래처로부터 관세 인상분의 일부를 물류비로 보전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고, 다른 수출 기업 D사는 관세 변동 전에 맺은 계약 물량인데도 단가 인상을 통보받았다. 신뢰를 토대로 오래 거래한 공급선인 데다 상대방 역시 어려움을 호소하는 상황이라 거절하기도 힘들다. 대기업은 하도급 협력사에 관세 일부를 전가하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관세 25% 중 1차 벤더를 중심으로 10%는 납품 단가를 강제 인하하고 10%는 완제품 가격 인상, 5%는 자구책으로 충당하겠다는 계획을 가진 대기업에 관한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장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이 촉발한 관세전쟁 사태의 심각성 때문이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제조업 전반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 간 격화한 통상 갈등의 충격은 한국처럼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가가 더 크게 받는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은 득보다 실이 더 클 것이라는 게 국내외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역사적으로도 관세전쟁은 승자 없이 모두에게 깊은 상처만 남겼다. 1930년대 스무트-홀리 관세법 사례처럼 극단적 보호무역주의가 장기적으로 경제 성장에 악영향을 끼친 것은 역사가 이미 증명했다. 미국이 성조기 하나조차 자국에서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는 현실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 놓친 세계 경제의 복잡한 상호 의존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제 관세전쟁이라는 거센 파도 앞에 한국 기업과 정부가 함께 노를 저어야 할 때다. 위기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하면 생존이 위태롭다. 특히 정부는 더 적극적으로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미국 행정부와의 고위급 통상 협의를 확대하고 한국 기업이 차별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양자·다자 협상 채널을 총동원해야 한다. 미국 빅테크 제재를 강화하거나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포함한 법적 대응 카드도 검토할 만하다. 기업에 대해선 긴급 금융 지원 등 현실적인 지원책과 함께 불합리한 추가 피해가 없도록 현장의 목소리에 세심히 신경 써야 한다.
김혜원 산업1부 차장 ki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