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패션이 옛날 군대에서 유래한 게 많다. 그중 스타킹은 갑옷으로 피부가 상하지 않도록 고안됐다. 하이힐은 중세 유럽 기병들의 장비였다. 말을 탈 때 등자에서 발이 빠지지 않게 높은 부츠로 무장했다. 프랑스 루이 14세는 작은 키를 감추기 위해 붉은 굽의 하이힐을 신었고, 곧 권위와 우월감의 상징이 됐다. 하수 시설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유럽 도시 거리엔 배설물과 오물이 넘쳐났는데, 굽 높은 신발은 오염을 피할 수 있는 실용적 선택이기도 했다.
시대가 바뀌며 하이힐에서 전장의 흔적은 사라지고, 런웨이와 파티장에서 여성의 상징으로 변모했다. 여성의 자존감, 패션, 사회적 위상을 상징하는 아이템으로, 멋을 위해서라면 무지외반이나 티눈의 고통을 충분히 감수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멋이 고통 감내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재택근무와 원마일웨어, 애슬레저룩이 확산되면서 하이힐은 ‘불편하고 촌스러운 것’으로 전락하는 중이다. 젊은 세대일수록 정장에 운동화를 매치하고, 격식을 해체한 패션을 추구한다. ‘하이힐=여성의 로망’이라는 공식이 깨지고 있는 듯하다.
시장도 이를 증명한다. 형지에스콰이아의 매출은 1년 사이 30% 이상 감소했고, 탠디, 소다, 미소페 같은 국내 브랜드들도 줄줄이 역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아식스, 푸마 등 스니커즈 브랜드는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 중이다. 미국에서도 하이힐 매출은 14% 줄어든 반면, 플랫슈즈와 메리제인은 무려 98%나 성장했다.
상징적인 장면도 있었다. 지난해, ‘섹스 앤 더 시티’로 하이힐의 여왕처럼 불렸던 배우 사라 제시카 파커의 이름을 딴 하이힐 브랜드 SJP가 오픈 11년 만에 폐업했다. 불편함에서 탄생한 발명품으로 권위와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등극했던 하이힐이 이젠 그 불편함으로 설움을 겪고 있다. 실용과 평등을 추구하는 시대에 높은 굽의 위엄이 언제 다시 패션계에서 지위를 회복할지 궁금하다.
이동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