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강남스타일, BTS, 영화 기생충 등 일과성 이벤트들에 머물렀던 세계의 관심이 이제 한국문화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K컬처로 대변되는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현상들, 그리고 그들의 명과 암을 사회과학적으로 관찰하고 반추해 봄으로써 한국문화의 본성을 재조명해본다.
‘롱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묵시적 약속이 생긴다. 기념일 챙기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필자였건만,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결혼기념일과 아내의 생일날엔 꼭 초콜릿과 함께 꽃을 보낸다. 그저 며칠 피어있다 사그라지는 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겠지만, 아내는 아마 그 막후에 집중할 것이다. 안겨진 꽃다발 뒤에는 ‘이 인간이 용케 기념일을 기억하고 있음’ ‘제날짜에 꽃을 배달하려면 최소 일주일 전에는 주문을 마쳐야 했을 것’ ‘환상의 고환율’ ‘꽃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짠돌이’ 등 여러 생각이 엉켜 함께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결혼기념일에 꽃은 배달되지 않았다. 해외 꽃 배달 서비스에서 필자의 국내 카드 사용을 ‘의심스러운 거래’로 간주해 친절하게도 결재를 취소해 주었기 때문이다. 꽃다발과 초콜릿이 없는 기념일. 쓸쓸히 세 식구만 남겨진 시골집. 어떻게든,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
아직 초봄이지만 뜨거운 태양 아래 두 개의 자전거가 힘차게 달린다. 부지런히 페달을 밟는 두 소녀의 이마와 등에는 땀이 흥건하다. 따가운 봄볕에 피부가 그을린다. 제법 싱싱한 꽃을 파는 그로서리까지는 약 2마일을 달려야 한다. 항상 엄마의 미니밴으로 편하게 다니던 곳이라 그런지 오늘은 유독 더 멀게 느껴진다. 포장이 벗겨진 울퉁불퉁한 시골길과 세 개의 큰 횡단보도를 지난다. 부랴부랴 나오느라 신었던 슬리퍼에 쓸린 발등이 점점 더 부어오른다. 얼른 돌아오지 않으면 엄마가 걱정하실 텐데. 더 빨리.
기념일을 놓친 필자는 꾀를 내어 아이들에게 긴급타전을 보냈다. 아빠는 꽃 배달에 실패했다. 요즘 엄마가 조금 외로워 보이더라. 엄마를 위한 서프라이즈를 해보면 어떨까. 두 아이는 이에 흔쾌히 응했다. 이날 두 아이는 그로서리에서 꽃다발을, 다시 근처에 있는 몰로 자전거를 달려 엄마에게 선물할 기프트 카드와 초콜릿, 스낵까지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각각 한 손에 꽃다발과 선물이 담긴 종이가방을 들고 어색한 모습으로, 올 때 더 힘겹게 자전거를 달렸을 것이다. 아내가 보내준 사진에는 분명 꽃다발과 초콜릿만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뒤에는 ‘아빠, 우리 잘했죠?’하며 땀범벅이 된 얼굴로 웃고 있는 두 소녀가 아른거렸다. 처음에는 면허증이 있는 맏아이의 친구와 꽃다발만 있는 필자의 심플한 상상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우리에게 선사한 선물 같은 하루에는 낡은 자전거와 땀에 젖은 옷, 그을린 얼굴, 부어오른 발등, 다 써버린 용돈, 그리고 가족이 있었다. 꽃 배달 서비스 따위로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몇 주 전 구독자 2400만의 한 유튜브 채널에서 ‘South Korea is Over(한국은 끝났다)’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공개되었다. 태극기가 녹아내리는 다소 과격한 섬네일을 단 이 비디오는 벌써 1000만이 넘는 세계인이 시청했을 정도로 파급력이 강했다. 이유는 전망의 수치적 구체성과 레퍼런스의 공신력이다. 크리에이터는 현재의 합계출산율 0.72가 지속될 경우, 2060년이면 한국 인구의 약 30%(약 1600만 명)가 증발할 것이며, 한국은 인구의 50%가 65세 이상인,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가 될 것이라 주장한다. 당장 출산율이 극적으로 상승한다고 가정하더라도 한국의 인구구조를 지속가능한 수준으로 개선하기는 어렵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도 함께 보여준다.
늘어나는 노령인구의 생계를 지탱할, 일하는 젊은이들이 태부족하여 경제는 주저앉을 것이고, 전통문화의 계승이나 새로운 K-문화 창달의 주역인 2040세대가 줄어 한국의 문화는 사라질 것이며, 징집 가능한 청년이 없어 국방도 곧 무너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각각의 주장은 나름 권위 있는 레퍼런스로 뒷받침되어 웬만한 지식인이 아니고서는 딱히 반박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댓글을 남기는 한국인들 역시 이러한 압도적 공포에 ‘남의 나라 걱정 말고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렇다 할 반론을 찾지 못해 지금 한국이 처한 현실에 그저 쓴웃음을 삼킬 뿐이다.
이 영상은 한국 사회가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특수성에 대한 분석도 제시한다. 한국전쟁 이후로 압축적 경제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발생한 과도한 경쟁구조와 워커홀리즘, 주당 최장 52시간에 달하는 과도한 근무 시간, 임금과 물가의 괴리로 일반인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내 집 마련의 꿈, 치열해지는 학벌 경쟁과 감당하기 어려운 사교육비, 취직 후에도 가사를 도맡아야 하는 여성과 그만큼 일에 더 매달려야 하는 남성. 뭐 이런 것들이란다. 딱히 인구문제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매우 뻔한 이야기가 짜증스레 이어진다.
영상은 저출산 문제가 단지 노동력의 감소나 경제적 손실이 아닌 인류와 사회의 생존 위협이라는 더 거시적이고도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하며 급히 막을 내린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은 거기에 없다. 저출산이 워낙 난제이니 쉽지는 않을 터. 그럼에도 비상구 없는 위협과 추궁은 문제의 해결이 아닌 회피를 초래할 뿐이다. 이제 좀 끊으라는 주위의 잔소리가 반복될수록 마땅한 대안이 없는 흡연자는 금연이 아닌 흡연의 정당화에서 해답을 찾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상에서도 적시한 바와 같이 출산은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이다. 그럼에도 그 아래에 달린 우리의 댓글에는 주로 정부의 무관심이나 무능력, 작금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대한 질책과 아쉬움이 있을 뿐 스스로를 탓하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정부의 복지정책도 출산 유도에 분명히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재정적 지원은 보조적인 수단에 그쳐야 한다. 아이 한 명당 매달 500만원씩 정부가 지급한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한국의 경제가 건실하고 이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추가 가정이 필요하다. 필자도 늦둥이를 고민하지 않을까. 현재의 경제 수준에서 그 돈이 그만큼의 가치를 유지한다면(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가정이다) 아마 젊은이들 역시 출산을 심각하게 고려할 것 같다. 둘만 낳아도 연봉이 1억2000만원. 번듯한 직장이 없다 하더라도 네 식구를 기를 수 있는 충분한 돈이다.
하지만 정부 시책에 적극 동참한 이들과 그 아이들을 보는 타인의 시선은 어떨까. 출산과 양육이 생계 수단으로 전락한 국가에서 부모와 가족은 그 의미의 퇴색과 해체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려다 기어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여러 번 보아왔다. 미국에서도 생계를 위해 ‘전문적으로’ 아이를 입양해 키우는 가정이 적지 않다. 물론 예외도 있겠으나, 이들이 자신을 희생해 끝내 아이들을 사회의 인재로 훌륭히 키워냈다는 미담은 들어본 적이 없다. 물리적으로 성장한 육체가 있을 뿐 그 안에 부모의 헌신과 감정적 교감으로 발현된 영혼이 깃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은 것이 자신의 살과 피였든 가슴이었든, 이는 온전히 ‘찐부모’만이 실현할 수 있는 인류적 가치이다. 2012년 UN에서 6월 1일을 ‘세계 부모의 날’로 지정한 이유도 이들의 공헌을 기리기 위함이리라.
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아이를 갖는 부모를 겉으로는 애국자라 치켜세우면서도, 속으로는 준비성이 없다거나 현실감각이 떨어진다 안타까워하는 것이 요즘 한국의 사회 분위기다. 이는 숫자와 계산, 논리가 섞인 복지정책으로 바꿀 수 없다. MBTI 중 T가 F에 비해 높은 비율로 결정장애를 겪는 이유는 결정의 주체가 이성이 아닌 감성이기 때문이다. 출산과 같이 중차대한 문제를 그깟 사소한 감정에 의지해 정해서야 되겠느냐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려 본들 거기서도 딱 떨어지는 정답을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우리는 숫자나 통계에 설득되지 않는다. 설득을 유인하는 것은 우리가 격하게 공감할 수 있는 나와 같은 타인의 삶 속이다.
광고를 보는 것이 강의 준비의 일부가 된 지 오래. 최근 창호를 생산하는 한 화학회사에서 출시한 광고를 보았다. 릴리스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이 광고의 조회 수는 무려 3600만. 아이를 갖게 된 젊은 부부의 인터뷰와 그들 일상의 단편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샴푸가 채 가시지 않은 머리로 욕실에서 달려 나와 우는 아기를 달래는 엄마, 기저귀와 함께 기어이 캔맥주를 바지 뒷주머니에 숨겨 들어온 철없는 남편, 온종일 계속되는 아기와의 씨름으로 이제 정수리 냄새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아내, 드디어 육퇴를 마치고 조용히 딴 캔맥주 소리에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밤에 몰래 헤드랜턴을 쓰고 아기의 손발톱을 깎아주며 소곤대는 부부. 어느 한 장면에서도 여유로움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고단한 일상이 계속될 뿐이다. ‘그럼에도’ 댓글에는 찬사가 이어진다. ‘출산장려 정책을 여기에 맡겨라’ ‘아이 키우던 20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더라’ ‘피곤에 피로가 겹쳐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낄 때 이 광고가 작은 위로를 주더라’ ‘아기들 키워내느라 고생하는 엄마, 아빠들, 모두 힘내자!’ ‘이게 진짜 저출산 시대에 필요한 광고지’ 등 육아 경험이 있거나 현재 아이를 기르고 있는 젊은 부부들의 공감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 ‘그럼에도’라고 했다. 그들은 ‘그럼에도’ 아이를 낳아 기르기로 했고, ‘그럼에도’ 스스로 고단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출산은 사적인 선택이므로 그들의 결정 자체가 사회로부터 칭찬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번듯한 한 인간을 사회에 내어놓기 위해 들인 공과 기여에 대한 존중은 마땅히 주어져야 한다. 정부의 선심성 정책만으로는 출산율을 끌어올릴 수 없다. 그들의 수고에 대한 사회적 공감과 진정한 가족의 가치 회복이 우선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사회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일으켜보자. 한국인처럼 변화에 민감한 민족은 세계사적으로 그 전례를 찾기 어렵다. 한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