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키워드 한 가지를 말하라면 ‘악마화’를 들 수 있다. 악마화란 단순한 비판을 넘어, 상대를 ‘절대악’으로 낙인찍는 행위다. 악마화된 상대는 더 이상 설득이나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제거돼야 할 짐승이요 괴물이다.
악마화는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고, 정치적 혐오를 증폭시키며,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한다. 공공 담론의 장은 설득과 토론의 공간이 아니라, 사법적 단죄와 선동의 전장이 되고 만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 악마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된다는 사실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생계 위기로 인하여 누적된 분노와 불안이 악마화의 정서를 더욱 공고히 만들었다. 여기에 SNS의 알고리즘은 자극적인 콘텐츠를 앞세워 확증편향을 강화한다. 악마화는 일시적인 현상을 넘어서, 반복되고 중독성 있는 사회적 구조로 굳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악마화를 극복하고 민주적 담론의 장을 회복할 수 있을까? 단지 악마화를 비판하며 그러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경은 보다 근원적 통찰을 제공한다.
첫째, 성경은 악마화의 배후에 실재하는 악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에베소서 6:12). 요한계시록도 로마 제국의 권력 뒤에 사탄의 거대한 세력이 있다고 본다. 악은 단순히 사람의 무지나 제도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구조적인 실체다. 이 통찰은 우리를 순진한 낙관론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인간은 선의나 합리적 개조만으로 악을 이길 수 없다. 선한 의도조차 권력으로 변질하고 정의는 폭력으로 탈바꿈한다.
둘째, 악은 ‘두려움’이라는 정서를 타고 사람의 내면에 자리 잡는다. 상대가 내 세계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 내 삶이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의식은 곧 혐오와 배제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상대는 강하고 교묘한 가해자이고, 우리는 약하고 선한 피해자로 인식된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내 안에도 두려움과 악이 동시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악의 화신이 분명한 적과 마주할 때 내 안에서도 악이 자라고 있다. 니체는 경고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셋째, 사랑은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한일서 4:18). 사랑은 내 안의 두려움과 맞설 수 있는 따뜻하면서도 강력한 에너지를 제공하며, 그 에너지가 상대를 환대할 여유를 준다. 우리가 두려움에 갇히지 않을 때, 상대는 더 이상 괴물이 아니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상처받고 흔들리는 한 인간이다.
악의 화신과의 싸움을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한답시고 정의의 단죄를 포기하자는 말도 아니다. 정의의 내면적 동기가 두려움이 아닌 사랑이어야 하며, 싸움의 목적이 상대의 궤멸이 아닌 세계의 구원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곧 예수님의 십자가 방식이다. 제도적 폭력과 종교적 위선이 결합한 악의 현장에서, 예수님은 그 악을 끌어안음으로써 악의 권세를 무력화하셨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주기도문의 간구는 단지 저 악한 상대로부터 보호받기를 바라는 외침만이 아니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유혹에서 나를 건져 달라는 고백이자, 악의 실재를 직시하되 사랑으로 맞설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애절한 기도다. 우리는 과연 악마처럼 보이는 그들 역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장동민 백석대 기독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