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일자리, 일하는 삶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하는 책에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들이 많이 나온다. 그중 하나다. 2017년 대규모 학살에서 살아남은 로힝야족 난민을 대상으로 미국 대학 연구진과 세계은행(WB)이 실험을 진행했다. 참여자 전원에게 동일 금액의 현금을 지원했지만 한 그룹에게는 별다른 조건을 걸지 않고, 다른 그룹에게는 일을 하도록 요구했다. 일은 특별한 숙련이나 경험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한 것들이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노동은 고통과 노력이 따르는 ‘비효용’을 수반하기 때문에 똑같은 현금을 받으면서 일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손해일 뿐이라고 말한다. 놀고먹을 수 있으면 굳이 힘들여서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일과 현금 지원을 병행한 그룹은 현금만 받은 그룹에 비해 정신건강, 인지 능력, 위험 대응 능력 등에서 압도적으로 나은 결과를 보였다. 연구진은 그 차이가 4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현금 지원이 줄거나 없어진다고 해도 계속 일하겠다는 난민도 70%에 달했다. 일과 일자리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연구 결과다.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으로 2018년부터 일하고 있는 저자는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차근차근 해답을 찾아간다. 가장 먼저 일자리의 가치에 대한 재인식을 강조한다. 일자리는 시장에서 지급되는 임금 이상의 사회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일자리는 일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가족, 이웃, 공동체 나아가 사회에 다층적 영향을 미친다”면서 “얼마나 많은 일자리가 필요한지를 따질 때 이런 사회적 영향도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기에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하다”고 말한다.
일자리의 진정한 가치는 잃고 나서야 알게 된다. 실업 얘기다. 실업이 일자리를 잃은 자신의 건강은 물론 가정과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인용한다. 실업자의 사망확률은 일자리를 잃자마자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 50~100% 수직상승하고, 부부 중 한쪽이 일자리를 잃으면 이혼 확률이 두 배 이상 증가한다. 부모 중 한 명이 일자리를 잃으면 자녀의 삶의 만족도도 급격히 떨어진다. 브라질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부모가 실업자가 됐을 때 자녀의 퇴학률이 1.5% 포인트 증가했다. 대규모 해고가 진행되면 범죄의 빈도가 23% 증가한다는 연구도 있다. 일의 사회적 가치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장의 논리만 들이댔을 때, 노동시장은 늘 ‘좋은’ 일자리를 과소공급하게 된다. “일자리를 만드는 데는 노력이 부족하고 느리지만, 일자리를 파괴하는 데는 지나치게 신속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하지만 최저임금 정도만 받으면서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나쁜’ 일자리는 넘쳐나는 게 현실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좋은 일자리의 사회적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반면, 나쁜 일자리의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지 않아 일자리의 순가치가 과대평가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산업재해 위험이 큰 일자리의 경우 재해를 당했을 때 본인은 물론 가족과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은 임금에 반영되지 않는다.
저자는 좋은 일자리를 키우기 위한 시작은 무엇보다 일자리에 대한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자리는 곧 인간의 생존이고 자존감이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굳건하게 자리 잡게 하는 매개체”라는 점을 명심하면서 “일자리의 다층적이고 포괄적인 사회적 가치를 모든 사람이 인식하고, 사회가 가용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일자리를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다양한 제안을 내놓는다. 근본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에서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32조에 문제를 제기한다. ‘부지런히 일한다’는 의미의 ‘근로’의 시각에서는 노동은 애초에 투자와 존중의 대상이 아니다. 저자는 “능동적인 주체로서 ‘노동’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산적 활동의 포괄성도 명시돼야 한다”면서 “‘근로의 권리’가 아니라 ‘일할 권리’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정책의 대전환도 강조한다. 한국은행은 물가 안정과 금융 안정을 양대 책무로 삼고 있지만 저자는 일자리를 통화정책의 주요 목표로 격상시킬 필요가 있고, 실업과 고용의 경계에 있거나 활동과 비활동까지 고려한 통계 지표를 개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저자 스스로 ‘급진적’이라고 말하는 제안도 등장한다. “국가나 사회는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해 정부는 필요하면 일자리를 창출해 시민들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보편적 일자리 보장’이라는 원칙이다. 정부가 최종 고용주(Employer of Last Resort)의 기능을 맡기자는 것이다. 민간 부문에서 적합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공공부문 또는 사회적 가치가 있는 일자리를 찾아내 최저임금 수준에서 정부가 지급하는 정책이다. 저자는 공공일자리가 민간일자리를 대체할 위험성과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최저임금 경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한계도 지적하지만 사회적 논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일자리는 시장에서 조직되지만, 시장은 때로는 실패하기 때문에 그 해법을 시장 바깥에서 찾아야 하는 경우도 많다. 저자는 시장의 논리와 인간의 존엄 사이에서 그 길을 찾기를 원한다.
⊙ 세·줄·평★ ★ ★
·일자리에는 임금에 포함되지 않은 더 큰 가치가 있다
·냉랭한 경제학에 '따뜻함'이 배어있다
·쉬운 듯하지만 쉽지 않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