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 벗고 영화 봤다… 그 시절 소녀들이 남긴 역사

입력 2025-04-25 02:20
‘작은 사람들의 일상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경험과 삶의 방식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1950~60년대 여학생들에게 영화 관람과 남녀 교제는 처벌의 대상이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 민중들은 ‘불경죄’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사진은 1959년 개봉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 ‘청춘 극장’ 포스터. 푸른역사 제공

일상사(日常史·Alltagsgeschichte)는 1980년대 독일에서 발전한 역사 연구 방식으로, 기존 거시적·구조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경험과 삶의 방식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접근법이다. ‘위로부터의 역사’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역사’다. 90년대 한국에 소개된 일상사는 점차 관심이 커지면서 다양한 연구와 성과물이 생산되고 있다. 이번 책은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한국과 독일, 영국 등에서 개최된 다섯 차례의 일상사 워크숍에서 발표된 논문 가운데 9편을 골라 엮은 것이다. 연구자 입장에서는 일상사의 연구 성과를 한자리에서 가늠해 볼 수 있고, 독자 입장에서는 생소한 일상사의 맛을 볼 수 있는 기회다. 학문적 의미를 떠나서 일상사는 ‘나와 같은’ 사람들의 역사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1938년 불경죄 처벌을 위한 현장 검증 사진. 푸른역사 제공

‘1950~60년대 풍기문란 단속과 여학생, 일탈과 저항’(소현숙)은 1950~60년대 여학생에 대한 ‘풍기문란(風紀紊亂)’ 단속을 미시적으로 접근한다. 일상사 연구의 필요성과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낸 연구가 아닐까 싶다. 주로 분석한 자료는 경기도 이천양정여자중고등학교의 학생지도와 관련된 서류들이다. 학생지도 관련 공문과 함께 교칙 위반 학생들에 대한 각종 징계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징계 처분 관련 문서들 속에는 교사와 징계 학생 간의 질의응답을 담은 청취서, 징계 학생의 반성문, 증거품 등이 첨부됐다. 당시 학생들의 생활 실태를 담은 귀중한 자료다.


당시 겨울방학을 맞아 학교에서 학부형에게 보낸 서간문을 보면, 영화와 연극 관람 불허와 오후 9시 이후의 외출 금지 등의 내용이 보인다. 크리스마스 예배 등 교회 행사로 인해 야간 통행이 불가피한 학생은 목사의 확인증까지 받아야 했다. 교칙 위반으로 인한 징계 조치 가운데는 시험 부정행위와 함께 영화 관람과 남녀 교제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중3의 두 여학생은 야간에 사복을 입고 이천 가설극장에서 상영 중인 ‘원한의 성’을 무단 관람해 정학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영화는 반공계몽 영화였지만 처분 대상이었다. 의남매를 맺고 남학생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고2 여학생은 학업 문제나 진로 고민을 공유하는 등 지금으로 보면 ‘건전한’ 만남을 이어갔지만 2주일의 근신 처분을 받았다. 심지어 남학생과의 교제를 부모가 허락한 경우에도 징계 처분이 내려진 경우도 있었다. 징계를 받은 학생들은 모두가 반성문을 제출하며 ‘순진한’ 여학생이 되겠다고 다짐했지만 학교의 감시를 피해 남학생과 편지 교환을 지속한 사례도 나온다.

학교에서 징계당한 여학생이 제출한 반성문. 푸른역사 제공

저자는 당시 다른 학교의 교지나 학생 잡지에 실린 글들을 통해 사회에서 주입한 여성다움이라는 규범에 불만을 나타내고, 저항의 씨앗을 키워나가는 모습도 포착한다. 저자는 “‘작은 사람들’의 일상적 행위와 실천들이 결국 일상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잠재력의 기반이 되었음을 발견하는 데 일상사의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불경죄 사건 기록 표지. 푸른역사 제공

이밖에 ‘일제 강점기 불경 사건과 행위자들’(정병욱)은 일제강점기 천황제 질서에 반하는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적용된 ‘불경죄(不敬罪)’를 주제로 삼았다. 불경죄로 처벌받거나, 잡아들이는 사람들과 ‘불경’을 활용하는 사람들을 심층적으로 다룬다. 16세기 한 가장의 가출이 가문에 던진 파문을 조명한 ‘16세기 유연 사건과 가족 갈등’(권내현), 18세기 남편의 부재 속에 사대부가의 여성의 청원과 소송을 분석한 ‘규범과 일상 사이에 선 조선 후기 사대부가 여성의 법 활동’(김경숙), 1970년대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원장과 수료생이 주고받은 편지에 나타난 일상정치를 다룬 ‘정치종교로서의 새마을운동, 신앙고백의 편지쓰기’(이상록), 형제복지원에 수용돼 폭력과 학대에 시달렸던 도시하층민 어린이의 경험을 조명한 ‘불운한 아이들’(주윤정) 등도 흥미롭게 읽힌다. 논문이라 어쩔 수 없는 딱딱한 문투와 어려운 용어들이 거슬린다. 대중적인 문장과 내용으로 다듬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