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 야간진료소 건립을 위한 기금 모금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나는 극장의 장로님 같은 분들을 직접 만나며 발로 뛰었지만, 대기업을 방문할 때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 사람은 최태민이었다. 정치인을 통해 이 일에 개입하게 된 것으로 보였지만, 그 정치인이 누구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무료 야간진료소로 사용된 2층 건물은 당시 서울신학대학이 경기도 부천 소사구로 이전해 비어 있던 자리였다. 1층은 무료 야간진료소로, 2층은 구국선교단 사무실로 활용됐다.
나는 화곡제일교회 이임과 무료 야간진료소 설립, 구국선교단 일을 위해 신뢰할 만한 감리교단의 박모 목사에게 함께 해주길 요청했다. 박 목사는 화곡제일교회를 이어 맡을 다른 목사를 소개해줬다.
황해도에서 태어난 박 목사는 일제 강점기 말기 교회의 황거요배(皇居遙拜:천황을 향해 절함)와 신도침례(神道浸禮)를 서울 남산에서 직접 목격하고 격노한 인물이다. 박 목사뿐 아니라 그 당시 월남 기독교인에게는 복음이 통일이고 통일이 곧 고향이었다. ‘복음’ ‘통일’ ‘고향’은 이념을 초월하고 교파와 교단을 넘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런 박 목사를 통해 당시 한국 교계에 명성 높은 목사들과 수많은 이들이 사역에 동참하게 됐다. 이렇게 함께하게 된 목회자들이 주축이 돼 구국기도회를 주관했다.
그 흐름 속에서 임진각 기도대회가 열리게 됐다. ‘임진각에 가서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크리스천들이 잠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자. 북한을 향해 함께 기도하자’는 취지였다. 그즈음 ‘구국 십자군’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 이름을 처음 듣게 됐다.
나는 임진각 기도대회를 준비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버스 10대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통령의 도움으로 시내버스 회사들로부터 각각 한 대씩 지원을 받아 총 10대의 버스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제주와 부산 등 먼 지역에서 올라온 기독교인들도 모두 여의도에 집결해 함께 출발했다.
1975년 5월 11일 오전 여의도 광장에 모인 기독교인들은 준비된 버스에 올라 파주 임진각을 향해 출발했다. 여의도에서 시청을 지나 불광동을 거쳐, 1번 국도를 따라 파주 문산으로 이동했다. 이 기도대회에 참여한 이들 대부분은 월남한 기독교인이었다.
이때까지는 모든 의도가 순수했다. 박 목사를 비롯한 이들 모두가 은혜 가운데 임진각에서 진심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온 뒤 상황이 급변했다. 최태민이 일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임진각 기도회가 열리고 불과 보름 뒤인 5월 25일 목사 100명이 1기 구국십자군으로 선발돼 군사훈련에 참여했다. 6월에는 배재중·고등학교에서 구국 십자군 선포식이 열렸다. 이런 과정에서 목사들은 점점 뒤로 물러나고 최태민이 점차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