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각종 행정 권력을 동원해 대학의 학문 연구마저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단하려 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게재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백악관이 하버드대에 배정된 22억 달러의 연방정부 보조금과 6000만 달러의 연구 계약을 무효화한 조치를 발표하자마자 나온 것이다. WSJ는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뉴욕타임스(NYT)와 사뭇 다른 논조로 각종 사안을 바라보는 미국 보수주의의 아성과도 같은 매체다. 그런 신문이 트럼프 2기 행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은 1기 때와는 너무도 다르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두 달간 선보인 정책은 관세전쟁, 불법 이민자 싹쓸이 추방, 보조금을 무기로 주요 대학 길들이기 등으로 요약된다. 미국 주류 언론들은 이 세 가지 정책에 대해 ‘고립주의’ ‘세계 경제질서 파괴’ ‘문화전쟁’이라는 비판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1970년대 이후 미국 사회 전체로 퍼져나간 다양성 존중, 이민 포용 등의 관용적 문화를 근절하려는 시도 자체가 시대적 역행이라는 시각인 셈이다.
매카시즘 향기 풍기는 트럼피즘
1950년 미국 상원의원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는 공산주의자를 미국 사회에서 뿌리 뽑아야 한다며 엘리트 대학과 노동조합, 지식인 사회에 광범위하게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있다고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소 냉전시대가 시작되던 당시에 매카시의 주장은 폭넓게 공감을 얻어 공산주의자 색출 선풍이 불었다.
수많은 지식인과 노동·시민운동가들이 공산주의자로 내몰려 추방됐다. 이들 중에는 실제 소련의 간첩이거나 공산주의자였던 인사들보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평범한 일반인이 훨씬 많았다. 1만2000명가량 민간인이 직장을 잃었고 수많은 외국인이 추방됐으며 학계와 언론계에선 진보 성향을 드러내는 일 자체가 금기로 여겨졌다. 매카시즘으로 명명된 이 선풍은 ‘미국판 문화대혁명’으로도 불렸다.
CNN과 NBC방송은 지난 10일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 이후 뉴욕·캘리포니아 등 최소 22개주에서 300명 넘는 대학·대학원 유학생 비자를 취소했으며, 방문교수와 연구원을 더하면 유학 관련 비자가 취소된 인원이 340명 이상이라고 보도했다. 비자 취소를 당한 이들은 대다수가 캠퍼스 내 팔레스타인 지지 및 이스라엘의 하마스 공격 반대 시위에 동참하거나 동조한 학생들과 중국 국적 학생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캠퍼스 내에 미치광이들이 있다”며 이들에 대한 비자 취소 조치를 계속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공산주의자 전부를 축출해야 한다”던 70여년 전 매카시의 의회 연설이 연상되는 발언이다.
유학생 추방… 다양성 사라지는 학교
컬럼비아대에서 친팔레스타인 시위를 주도한 뒤 체포된 마흐무드 칼릴은 텍사스주로 이송돼 수감됐다. 한국계 영주권자인 컬럼비아대 정윤서(21)씨도 같은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영주권이 박탈되고 공공 소란 혐의로 기소됐다. 두 사람과 비슷한 사례는 수도 없이 발생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범죄를 이유로 비자 취소와 함께 추방 위협을 받는 학생까지 늘어나는 모양새다.
NBC는 국토안보부가 데이터 분석 도구를 활용해 유학생들의 소셜미디어 기록을 조사하고 비자 취소 사유를 찾는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내세우는 유학생 비자 취소의 법적 근거는 매카시가 활동하던 시기인 1952년 제정된 전시 이민·국적법이다. 이 법에는 “미국에 잠재적으로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 시민권자가 아닌 사람을 추방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미국 각지에선 ‘인종적·성적 차별 등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다양성 존중 문화가 속속 사라지고 있다. 몇몇 레드 스테이트(공화당 장악 주) 공립학교들의 학생 준칙에선 다양성 존중 조항이 삭제됐다. 공공연하게 차별적인 발언을 할 경우 법적 처벌을 감수해야 했던 분위기도 없어져 간다.
구글, 메타 등 빅테크 기업들까지 정부 눈치를 보며 사내의 다양성 존중 규칙을 없애고 있다. 연방정부의 각종 규제를 피하기 위해서다.
합법적 이민자나 외국 학생들도 미국 정부에 반대하는 작은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대학 캠퍼스에선 반정부 집회는 물론 정치적 의제를 다루는 학생 클럽마저도 숨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다.
터져 나오는 문화전쟁 반대 목소리
앨런 가버 하버드대 총장은 지난 21일 “미국 고등교육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엄중한 결과를 초래한다”면서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보조금 중단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가버 총장은 유대인으로 2023년 가자지구 전쟁 발발 당시 “하버드대가 하마스의 테러 행위에 대해 비판 수위를 높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던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이처럼 강력한 반대 목소리를 낼 정도로 트럼프 행정부의 조치는 대학 검열에 가깝다는 게 미국 학계와 언론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하버드대가 트럼프 행정부에 맞서자 스탠퍼드대, 컬럼비아대, 메사추세츠공대(MIT) 등 다른 주요 대학도 일제히 동조하고 나섰다.
이민자 변호사 단체들은 연방정부의 일방적인 이민자 구금 및 추방이 불법이라며 연방법원에 취소 소송을 제기했고, 이들이 제기한 추방 금지 긴급명령 신청 사건들은 각 주의 연방법원과 대법원에서 속속 인용 결정이 내려지고 있다.
NYT는 “사법부와의 갈등도 불사하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문화전쟁은 1960년대 말 흑인 인권운동과 히피 문화운동 등으로 좌초된 매카시즘처럼 결국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진단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