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AI 지브리만 남은 세상

입력 2025-04-24 00:38

요즘 지브리 만화풍 그림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고 있다. 오픈AI의 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에 캐리커처 기능이 생기면서다. 사진을 업로드하고 캐리커처를 그려 달라고 하면 금방 그림을 만들어준다. 구체적인 조건을 말하면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 원하는 그림을 척척 생성한다. 가장 화제가 된 건 스튜디오 지브리 스타일이다. 사진을 올리고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캐리커처를 그려줘’라는 식으로 프롬프트를 넣으면 챗GPT는 근사한 지브리풍 그림을 내놓는다. 원본 사진의 구도는 그대로 살리면서 지브리 특유의 감성을 담은 그림이 완성된다. 지브리 만화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마저 든다. 하나의 사진으로 여러 스타일을 주문해 봤다. 심슨, 스누피, 일본 순정만화 등등 원하는 스타일을 입력하면 자판기처럼 그림을 내놨다.

한창 재밌게 쓰던 도중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지인들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하나둘 지브리풍 그림으로 바뀌면서다. 여러 선택지 중 지브리가 최우선 순위가 된 것이다. 주변 지인 상당수가 동시다발적으로 비슷한 모습으로 ‘프사’를 바꾸는 현상은 무척 생경했다. AI가 주는 편의성이 문화·예술의 다양성을 말살하고 획일화할 수 있다는 섬찟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문화·예술 영역에서 AI를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는 건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특히 영상 콘텐츠에서 AI는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데 요긴하다. 최근 영화에서 컴퓨터그래픽(CG)은 필수가 됐다. 이걸 전문인력이 일일이 작업하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시간을 줄이려면 여러 사람이 붙어야 한다. 결국 다 비용이다. ‘터미네이터2’ ‘아바타’ 등을 연출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AI로 블록버스터 제작비를 절반 이상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비용과 시간을 다른 창의적인 작업에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스테이블 디퓨전 개발사 스테빌리티 AI의 이사회에 합류했다. 기술을 이해해 영화 산업에 접목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AI가 도구 이상으로 외연을 확대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사용자가 사진을 올려 캐리커처로 변환하는 행위는 AI에 양질의 학습 데이터를 제공하는 셈이다. 지금도 좋은 결과물을 뽑아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확하고 풍부한 표현을 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것이다. 여기에 그림 한 장으로 동영상을 만드는 AI도 이미 나와 있다. 어느 시점엔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사진이나, 적절한 프롬프트만으로 지브리풍 영상을 만들 수도 있는 시대가 올 수 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화풍의 영상이 손쉽게 대량 생산되는 시대가 머지않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2016년 인터뷰에서 AI가 만든 이미지를 “생명 그 자체에 대한 모욕”이라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AI는 만든 사람의 고통이 뭔지 전혀 모른다. 이 기술과 내 작업을 결합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우리가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림체 때문이 아니다. 각 작품이 주는 고유한 감성이 핵심이다. 가족, 사랑, 환경보호 등 작품에 깔린 메시지와 화풍, 음악 등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종합적인 결과물이다. 작품 최종본이 나올 때까지 수많은 고민과 노력이 따른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향후 범용인공지능(AGI)이 등장하면 인간이 창작 활동에서 배제될 가능성도 있다. AI가 학습 없이 스스로 사용자가 좋아할 스타일을 창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작의 고뇌 없이 만들어진 영상에 마음이 움직일까. AI 시대에 인간의 창의성을 어떻게 지킬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김준엽 문화체육부장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