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에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유럽과 중국이 보복 방침을 밝히면서 무역전쟁이 확대되고 미국이 주도해 온 자유무역 기반의 국제 통상 질서도 보호무역주의로 급변하고 있다. 이처럼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고 급속도로 발전하는 AI 기술을 포함해 국가 간 기술 패권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각국은 자국의 전략산업을 보호하고 기술 주권을 강화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와 관련, 국내에서도 의미 있는 발표가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달 말 국가핵심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보호 체계를 강화하고자 산업기술보호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그런데 개정안에는 안타깝게도 중대한 맹점이 존재한다. 외국인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국내 사모펀드 규제가 공백 상태로 남아 있다. 이에 기술 안보 측면에서 심각한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현행 법령에 따르면 외국인이 국가핵심기술 보유 기업을 직접 인수하거나 외국계 기업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수할 때는 산업부의 사전 승인 또는 사후 신고·심사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국내에 등록된 법인이라면 외국 자본이 사실상 지배력을 행사하더라도 법적으로는 ‘국내 자본’으로 분류돼 규제 대상에서 빠지게 된다. 즉, 외국 자본이 국내 사모펀드를 활용해 전략 기술을 보유한 기업에 우회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둔 것이다. 실질적 지배력이 있음에도 형식적으로 ‘국내 법인’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규제의 사각지대가 여전히 존재한다.
최근 논란이 된 MBK파트너스의 고려아연 인수 시도는 이 규제 공백의 우려가 현실화한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MBK는 국내 법인 형태를 띠고 있지만 주요 임원과 출자자 상당수가 외국인으로 구성돼 실질적으론 외국 자본의 통제를 받고 있다. 인수가 성사될 경우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된 하이니켈 전구체 등 전략 기술이 외국 자본에 노출될 수 있다.
해외 주요국은 이런 위험에 대응해 ‘실질적 지배’ 개념을 광범위하게 적용하고 있다. 미국은 연방규정집(CFR)에서 외국인이 통제하거나 통제 가능한 모든 법인을 외국인으로 간주하며, EU도 2024년 개정된 외국인 투자심사 규정을 통해 실질적 지배력 기준을 도입하고 모든 회원국에 심사 시스템을 의무화했다. 이처럼 외국 자본의 영향력을 판단하는 기준은 ‘국적’에서 ‘지배구조’로 이동하는 추세다. 우리도 외형적 국적이 아닌 실질적 지배력과 통제 구조를 기준으로 심사 대상을 판단해야 한다.
국가핵심기술은 단순한 경제적 자산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안보를 떠받치는 전략적 기반이다. 미국발 보호무역 강화 정책으로 전 세계가 자국 산업 보호에 열중하는 지금이야말로 외국 자본의 실질 지배 가능성을 차단하고, 기술 주권을 실질적으로 지켜낼 수 있는 정교한 제도 설계가 절실한 시점이다.
송헌재 (서울시립대 교수·경제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