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만 했던 드라이브, 운전대 잡은 시각장애인

입력 2025-04-23 03:02 수정 2025-04-25 08:45
중증 시각장애인 한솔씨가 서울 마포구 서부운전면허시험장에서 한국도로교통공단 직원의 도움을 받아 운전을 하고 있다.

“친구들 엄마 아빠는 다 차가 있는데 우리는 왜 복지콜만 타?”

중증 시각장애인 한솔(40)씨는 일곱 살 딸아이에게 들었던 이 말이 가슴에 깊이 남았다. 한씨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파서 이번 기회에 영상으로라도 운전하는 엄마의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씨는 같은 장애를 지닌 남편 김익환(41)씨와 함께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서부운전면허시험장에서 열린 ‘시각장애인 운전체험’ 행사에 참여했다.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실로암복지관)이 한국도로교통공단 서부운전면허시험장과 함께 마련한 이 행사는 현행법상 직접 운전이 불가능한 중증 시각장애인이 잠시나마 ‘운전의 꿈’을 현실로 경험하는 자리다. 5년째인 올해 체험엔 6명의 중증 시각장애인이 참여했다. 참가자 중엔 근소한 빛만 감지하거나 일부 시야만 남은 저시력자뿐 아니라 혼자 보행이 어려운 정도의 완전 실명인(전맹)도 있었다.

이들은 먼저 실내에서 운전 시뮬레이터를 체험하며 액셀과 브레이크, 기어, 스티어링 휠(핸들) 등 작동법을 교육받았다. 운전석에 앉은 참가자들은 조심스레 핸들에 손을 뻗었다가 살짝만 돌려도 크게 반응하는 차량의 움직임에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도 진짜 운전을 하게 된다는 기대감에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시각장애 1급 저시력을 지닌 서민희(36)씨는 “언젠가 무인차가 나오면 가능하겠지 막연한 생각만 했지 운전은 나와 무관한 일로 여겼다”며 “오늘 차를 직접 움직여보니까 정말 신기하고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

체험교육을 마친 뒤 실제 시험용 도로 트랙인 도로주행시험장소로 나갔다. 공단의 관리하에 참가자들은 2인 1조로 차량에 올라타 번갈아 운전대를 잡았다.

긴장감에 얼굴이 굳어졌던 참가자들도 차량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즐거움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제한 속도는 시속 30~40㎞였지만 이들에게는 충분히 완벽한 ‘드라이브’였다. 이들이 운전하는 차량에는 공단 소속 시험관과 보호자가 함께 탔다.

대학교 3학년으로 이날 참가자 중 막내였던 김지명(20)씨는 전맹 청년으로, 운전의 경험은 더욱 강렬했다. 그는 “직접 운전해보니 익스트림 스포츠 같았다. 부모님이 그동안 몇 시간씩 운전해주신 게 새삼 존경스럽고 감사하게 느껴졌다”며 환하게 웃었다.

딸을 위해 참가했다던 한씨는 체험을 마친 뒤 딸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고 했다. “엄마도 어려운 걸 해냈으니 너도 힘든 일이 있으면 도전해보자. 그게 진짜 용기야.”

이번 행사를 지원한 실로암복지관은 1998년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된 대표적 시각장애인 복지기관이다. 실로암 스포츠여가팀의 임강민(30)씨는 “매번 행사를 준비할 때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도전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더 나아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리는 사회가 되길 기도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