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이 며칠 지난 후 부산 브니엘고등학교에서는 특별한 수업이 진행됐다. 어느새 선생의 나이가 된 중년의 제자들이 아흔을 바라보는 선생님을 위해 마련한 마지막 수업이었다. ‘별의 시간’ ‘앤딩파티’라 불린 이날은 선생과 제자가 미리 작별 인사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앤딩’이라 한 것은 끝을 뜻하는 엔딩(Ending)이 아니라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는 의미의 ‘Anding’이어서다.
이규현(수영로교회) 송길원(하이패밀리) 목사 등 이젠 어엿한 목회자이자 어른이 된 제자들은 스승을 위해 조의금이 아닌 축하금을 모았고, 고급 오픈카도 빌려왔다. 선생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며 마지막까지 예수 사랑과 섬김을 몸소 실천했다. 행사 후 선글라스를 끼고 오픈카에 오른 스승은 꽃을 던지며 배웅하는 제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생의 마지막 길을 향해 달렸다. 2022년 5월 브니엘고에서 열린 사제 간 작별의 시간은 이렇게 유쾌하게 마무리됐다.
1969년부터 2008년 은퇴할 때까지 브니엘중·고교 교목, 수영로여자신학원장 등 평생 학원선교에 헌신한 이정삼(87) 석포교회 원로목사가 바로 그 스승이다. 이 목사를 지난 1일 부산시 남구 대연동 석포교회(채문식 목사)에서 만났다.
이 목사는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하면서도 참으로 고마웠다”고 미소지으며 앤딩파티 당시를 떠올렸다. ‘아이들에게 좀 더 잘해줄걸’하고 후회했다는 이 목사는 학생들과의 인연을 두고 ‘은총’이라고 표현했다. 마치 거래하듯 만나는 세상의 만남이 아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였다는 노(老) 선생의 고백이다. 인터뷰 내내 과거 학생들과의 추억을 세세히 쏟아낸 이 목사는 학생들의 이름을 매번 정확히 기억해 말했다.
“아(이)들이 최악의 상황에 부닥치면 유일하게 찾아오는 곳이 교목실입니다. 성경만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니고. 저들 편이 돼주고, 문제를 해결해주니 편하게 찾아왔던 게 아닌가 싶어요.”
한번은 일명 ‘노터치 클럽’의 우두머리로, 칼부림도 마다치 않는 아이가 흉기에 찔려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목사는 피투성이가 된 그를 직접 병원에 데려가 겨우 살려냈다. 학교에선 모두가 그를 퇴학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이 목사는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했다. 그렇게 2주간 그를 먹이고 달래가며 겨우 졸업까지 시켰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이 목사가 그를 다시 만난 건 초청받아 간 어느 교회의 집회가 끝난 후였다.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그는 “이 교회 집사가 됐다”며 “그때 사람처럼 대해준 건 선생님이 처음이었다”고 이 목사에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런 아이도 복음이 들어가니 달라집디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바뀝니다. 늘 아이들에게 큰 나무도 처음엔 작지만 눈보라를 견뎌내면 크게 자라듯 믿음만 가지면 세상 부러울 것 없다고, 예수는 꼭 믿으라고 가르쳤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겨우 중학교를 마친 이 목사 역시 고등학생 때 허무주의에 빠져 삶을 저버리려 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방황하는 아이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이 목사는 죽기 위해 먹은 약을 바닷가 백사장에 다 토해내고 정처 없이 떠돌다 우연히 들어간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건 그때였다. 이후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로 올라와 1967년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됐다.
1969년 4월 아내와 함께 전셋값 7만5000원짜리 단칸방에서 시작한 가정교회가 지금의 석포교회에 이르렀다. 평일에는 교목으로, 주일에는 교회 사역에 집중했다. 다음세대 사역에 관심이 컸던 그는 방학 때면 전국을 누비며 학생집회를 인도했다. 재밌는 일화를 곁들인 설교와 강력한 회개운동으로 유명해지며 교회도, 학교도 덩달아 부흥했다. 80년대 무렵엔 매주 초등학생만 1500명 넘게 모였을 정도다.
이 목사는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무엇보다 설교가 한 편의 드라마처럼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밌는 설교를 위해 성경은 물론이고, 영화나 책을 숱하게 찾아봤고 구연동화도 배웠다. 그래야 청중과 소통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인 송 목사는 학교 다닐 때 제일 재밌는 시간이 이 목사가 가르치는 성경 수업이었다고 한 회고문에서 밝혔다. 성경 이야기는 물론이고, 고전과 동화를 왔다 갔다 하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 목사의 수업에 대해 송 목사는 “속으로는 ‘저거 뻥이데이’하면서도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결론은 항상 심금을 울렸다”고 했다.
이 목사가 복음과 함께 아이들에게 늘 강조한 건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반드시 너희에게 좋은 기회가 온다”는 응원의 말이었다.
“요즘 학생과 교사 관계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고 소통이 어렵다고들 합니다. 아이들의 문화나 관심사, 사고방식을 많이 연구하며 대화하면 길이 보입니다. 아이들을 이해하려는 자세로, 학생의 때에 변하지 않는 소중한 가치를 전수하는 일이 계속 이어졌으면 합니다.”
이 목사가 학원선교 외에 또 집중한 건 장례사역이었다. 과거 석포교회가 위치한 동네 특성상 장례를 치르는 일조차 버거운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례비도 받지 않고 한 건, 두 건씩 장례를 도와주다 보니 어느새 전문가가 됐다. 직접 장례를 치른 것만 1200번이 넘는다고 했다. 직접 염을 해준 이도 500여명에 달한다.
“목회자는 교회 주변 이들과 관계를 잘 맺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한 번은 결핵으로 온 방에 피를 토하며 죽어간 이의 방을 휘발유로 다 닦고는 시신을 수습해 목욕까지 다 시키고 장례를 치러줬죠. 장례를 다 치르고 나면 으레 고맙다며 돈 봉투를 들고 오지만 일절 받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교회 다니지 않던 그의 딸과 사위가 그다음부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합디다. 그렇게 공짜로 장례를 치러주다 보니 자연스레 전도도 되고, 어느새 교회 주변 사람들과 가족처럼 끈끈해지더군요.”
최근에는 평생의 벗처럼 막역하게 지내온 고(故) 정필도 수영로교회 원로목사(1941~2022)의 천국환송위로예배를 인도하며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이 목사는 종종 학생들에게 인근 화장터에 가볼 것을 권유했다. 학생의 때 삶의 끝 순간을 직접 보며 인생의 방향을 잡아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은퇴하고 나서는 한 요양병원에서 원목으로 섬기며 죽음을 앞둔 이들이 천국 소망을 품도록 전도했다.
이 목사는 인터뷰 도중 연신 “인터뷰할 만한 위인이 못 된다”며 자신을 낮췄다. 하지만 한국교회 원로 중 한 사람으로서 분열하는 요즘 한국사회에 어떤 목회자가 필요할지 묻자,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는 단호한 투로 말했다.
“목회자는 무엇보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생계 수단으로서 목회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일하셔서 가능했지, 내가 한 게 아닙니다. 나는 그저 전깃줄일 뿐, 원전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부산=글·사진 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