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손에 비닐봉지를 든 여인… 조각이야 사람이야?

입력 2025-04-22 23:07
호주 출신 조각 거장 론 뮤익의 아시아 최대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려 인기 몰이를 하고 있다. ‘쇼핑 하는 여인’에서 보듯 극사실적 조각이 주는 드라마성은 여느 작가에게서는 볼 수 없는 뮤익만의 강점이다. 뉴시스

삶에 지친 듯 눈이 초점을 잃었다. 살짝 건드려도 눈물이 쏟아질 듯한 눈이다. 그런 엄마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기는 엄마의 낡은 외투에 싸여있다. 유모차를 살 형편이 못 됐을까. 엄마의 양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 있어 아이를 업거나 안을 손이 없다. 호주 출신 현대 조각의 거장 론 뮤익(67)의 아시아 최대 규모 회고전이 한창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전시는 개막 10여 일만에 입소문이 나며 관람객들이 아침부터 문 열기를 기다리는 ‘오픈런’이 연출되고 있다.

‘매스’. 연합뉴스

뮤익은 2001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쪼그리고 앉은 소년을 거대하게 묘사한 조각 ‘소년’이 화제가 되며 일약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대상을 뻥튀기하거나 축소하는 제작 기법으로 유명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인간 두상의 몇 배가 되는 크기의 해골 100개를 층고 높은 전시실에 아득히 쌓아올려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출했다.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이 작품 ‘매스’는 파리의 카타콤베(지하 묘지)에서 허물어지듯 천장까지 쌓인 뼈를 본 충격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스펙터클함이 주는 감동은 잠시다. 관람객의 발길을 더 오래 붙잡는 것은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사람 조각이다. 단순한 입상 혹은 좌상이 아니다. 머리카락 한올 한올, 늘어진 뱃살의 주름 하나하나, 바랜 옷감 느낌까지 살려 상황극처럼 담아낸 조각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조각에 어떤 사연이 숨어있을까.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덕분에 정지된 조각임에도 한편의 드라마가 머릿속에서 휙 지나간다. 저 ‘쇼핑하는 여인’처럼 말이다. 각자의 처지와 연결돼 감정이입까지 된다. 작품을 본 50대 여성 A씨는 22일 “일에, 가사에, 애들 교육에 지친 나를 보는 듯했다”고 말했다.

‘젊은 연인’. 연합뉴스

또 다른 조각 ‘젊은 연인’을 보자. 구질구질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 주머니에 한쪽 손을 찔러 넣은 자세에서 불량함이 느껴지긴 했다. 여자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은 남자의 포즈를 보고 ‘두 사람이 연인 사이인가’ 생각하는 순간, 작품의 뒤쪽으로 돌던 관객은 깜짝 놀라고 만다. 여자의 손목을 거칠게 잡은 남자의 자세에서 관람객은 폭력적인 관계에 대한 상상의 날개를 펴며 저마다 드라마 한편을 쓰게 된다.

‘배에 탄 남자’. 연합뉴스

뮤익의 조각이 갖는 드라마성은 이처럼 뒷모습에도 세부적인 표정이 있기 때문에 더 강화된다. 벌거벗은 채 혼자 ‘배에 탄 남자’의 등을 보자. 모든 슬픔이 죄다 모인 듯한 등골은 팔짱을 낀 채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 주름지고 불룩한 배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넓은 전시장엔 조각 작품 2∼3점만이 설치돼 있다. ‘마이너스의 미학’ 덕분에 관객들이 작품에 몰입하며 교감하는 자장이 형성된다.

뮤익의 작품 세계는 역시 극사실적인 인물 조각으로 유명세를 얻은 비슷한 연배의 이탈리아 조각 거장 마우리치오 카텔란(65)과 비교된다. 카텔란이 무릎 끓은 히틀러, 별똥별을 맞아 넘어진 교황 등 사회 풍자적 메시지를 담는 것과 달리 뮤익은 철저히 개인적인 문제, 즉 희로애락 등 삶의 문제로 주제를 국한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전 국민의 눈물을 쏙 빼놓은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닮았다. 이 드라마는 제주 4·3항쟁, 1987년 민주화시위, 1994년 김일성 사망 등 한국 근대사의 주요 사건을 외면하거나 ‘소품’처럼 취급하는 극 전개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부모는 미안했던 것만 사무치고, 자식은 서운한 것만 사무친다’ 같은 명대사를 낳은 가족 서사로 전 국민의 공감을 샀다. 뮤익의 작품 세계도 사회 비판은 비껴가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삶에 대한 깊은 사유가 오픈런을 부르는 힘이다.

작가는 미대를 나오지 않았다. 생업으로 영화와 TV 분야에서 마네킹과 소품을 제작하던 그는 1996년 장모이자 화가 파울라 레고의 의뢰로 조각 ‘피노키오’를 만들면서 미술계에 데뷔했다. 영국의 광고 재벌이자 컬렉터 찰스 사치의 눈에 띄며 사치가 1997년에 기획한 ‘센세이션’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론 뮤익 스튜디오 협력 큐레이터 찰리 클라크는 “부모가 장난감 가게를 했다. 뮤익도 장난감과 인형을 만들며 조형 실력을 키웠다”면서 “성인이 된 후 어린이 TV프로그램의 캐릭터 인형을 만들었는데, 어린이 관객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면서 관객과 소통하는 감각을 키웠다”고 말했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