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마오쩌둥 주석 빼닮은
트럼프의 反엘리트 계급투쟁
아무리 극과 극이 통한다지만
자율 옥죄면 민주 시스템 붕괴
6·3 대선 앞둔 한국 정치도
섣부른 벤치마킹 절대 삼가길
트럼프의 反엘리트 계급투쟁
아무리 극과 극이 통한다지만
자율 옥죄면 민주 시스템 붕괴
6·3 대선 앞둔 한국 정치도
섣부른 벤치마킹 절대 삼가길
“극과 극은 통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3개월이 지난 지금의 미국 정치를 이보다 더 정확히 설명하는 말이 있을까. 미국 시사주간 ‘애틀랜틱’은 트럼프의 정책 기조를 ‘우익 마오이즘’이라 진단했다. 국가 권력이 지식인을 배제하고, 제도와 기관의 자율성을 해체하며, 충성만을 기준으로 인사를 단행하는 방식이 1960~70년대 중국공산당의 문화대혁명과 닮았다는 것이다. 홍위병 대신 일론 머스크가 총대를 메고, 나팔수가 대자보에서 트루스소셜로 바뀌었을 뿐이다.
트럼프 진영은 표면적으로 ‘woke(깨어있는 진보)’를 표방하는 좌파에 맞선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들의 수단까지 모방해 ‘우파 버전의 DEI(다양성·형평성·포용)’를 강요한다. 세계 최고 지성의 산실 하버드대학에까지 이념적 다양성을 내밀면서 동시에 “이념적 리트머스 시험지를 폐지하라”고 요구한다. 자유 수호 미명하에 자율을 옥죄는 이 아이러니는 ‘우익 마오이즘’ 진단에 설득력을 더한다.
그의 공격 대상은 단순한 진보 엘리트가 아니다. 정보화 시대에 형성된 ‘전문·관리 계급(PMC)’, 즉 교수, 기자, 과학자, 고위 관료, 법률가 등 지식자본을 기반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온 집단이 바로 그들이다. 트럼프식 숙청 방식은 이들을 국민을 배신한 지식 카르텔로 간주하고, 그 생존 기반 자체를 해체하려는 데서 마르크스의 계급투쟁과도 닮았다. 예산 중단, 면세 자격 박탈, 정책 감사 등은 정치적 정화작업의 도구일 뿐이다. 불법 체류자 추방으로 노동력 부족이 우려된다는 지적이 거세지자 트럼프 진영 인사들이 내뱉는 말은 더 가관이다. 해고된 연방 공무원들을 제조업 인력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인데 이는 마치 마오쩌둥 주석이 도시 지식청년을 농촌으로 보낸 ‘하방(下放)’을 연상케 한다.
흥미로운 건 트럼프가 겨냥한 PMC는 하버드대의 마이클 샌델 교수가 ‘공정이라는 착각’과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지적한 오만한 능력주의 엘리트와 겹친다는 점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방식은 샌델이 제시한 도덕적 겸손, 공동선의 회복, 공정한 기회 재구조화와는 정반대다. 트럼프에게 정의란 ‘누가 정의를 말할 수 있는가’라는 윤리적 물음이 아닌, 제거와 낙인의 정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결과는 시스템의 민주화가 아니라 ‘지배 엘리트의 교체’로 귀결될 뿐이다.
이 같은 트럼프식 반엘리트주의 물결이 태평양을 건너 한국 정치에도 스며들 조짐이다. 6월 3일 조기 대통령선거에서 집권이 유력한 더불어민주당은 기획재정부 개편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겉으론 예산과 정책 기능을 분리하는 행정적 개편처럼 보이지만, 이면엔 정치적 노림수가 도사리고 있다.
민주당 측은 “예산이 정책을 지배하는 구조를 바로잡겠다”며, 대통령실이나 총리실에 기획예산처를 신설해 기재부의 예산 권한을 박탈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지역화폐’나 ‘기본소득형 복지정책’ 등 이재명 전 대표가 추진했던 핵심 정책에 줄곧 반대해온 기재부는 민주당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번 개편이 예산 기능을 권력 통제 하에 두려는 시도, 곧 트럼프식 PMC 공격과 다를 바 없다는 의심이 나오는 이유다. 자율은 자의로 바뀌고, 제도 개혁은 정치 개편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따라서 예산실의 ‘주소지’를 바꾸는 식의 조치만으로는 실패를 반복할 뿐이다. 예산 권한의 정치화는 정권 중심의 또 다른 PMC를 탄생시킬 위험이 있다. 진정한 개혁은 단순한 권한 분산을 넘어, 책임의 공유와 공개성, 협치, 그리고 민주적 통제의 제도화를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정권이 바뀌고 조직표 몇 줄이 달라진다 한들, 결국 진짜 승자는 또다시 모피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재부가 형성해온 독점적 카르텔의 해체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세입과 세출을 틀어쥔 기재부는 각 부처의 자율성을 억압하며 실질적 ‘정책 사전심사기관’으로 기능해왔다. 정부마다 개편을 외쳤지만, 모피아는 살아남았고 오히려 더 강해졌다. 정치가 그들을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닮아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야말로 더 깊은 비극이다. 수십 년간 권력에 기생하며 회전문 인사, 낙하산 인사를 통해 한국 사회 발전을 지체시켜온 고질적 관료주의와 독점 구조야말로 진짜 해체 대상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 질문은 ‘누가 정의를 독점해왔는가’로 이어져야 한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