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말 대신 묵묵히 직접 보여주는 장인들…
무책임한 변명 일삼는 엘리트가 배워야
무책임한 변명 일삼는 엘리트가 배워야
역사의 한 페이지가 일단락됐다. 123일. 혼돈의 시간에서 내가 목격한 건 민낯이었다. 엘리트 집단의 민낯 말이다.
서울대 법대 나와 사법시험 패스했다는 사람이 불법을 지시했다. 육사와 경찰대 출신 수많은 별과 무궁화는 지시를 받들어 총칼 들고 국민을 위협했다. 행정고시 관료들은 쪽지 주고받으며 부처별 지시 사항을 받들어 모셨단다.
더욱 뜨악한 건 그 다음날부터다. 그들이 청문회와 헌법재판소 등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똑똑하고 잘났다는 고위 공직자 가운데 누구 하나 나서서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거짓말하고, 변명했다. 부하 직원에게 잘못을 전가했다. 한마디로 비겁했다.
그리하여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주문을 선고할 때 느낀 감정은 통쾌함이 아니라 자괴감이었다. 겨우 이 정도 수준이었던가. 이런 사람들이 나와 나의 이웃을 대표해 왔던가.
민낯을 지켜보며 난 건설 현장의 ‘쇼쿠닝’을 생각했다. 원칙이니 상식이니 하는 거창한 말 대신 몸으로 묵묵히 보여주는 쇼쿠닝의 태도 말이다. 쇼쿠닝을 직역하면 장인이다. 현장에선 ‘기능공 수준을 두어 단계 뛰어넘는 역량과 자세를 갖춘 목수’를 쇼쿠닝이라 부른다.
첫째, 쇼쿠닝은 기본을 지킨다. 모든 건축은 설계 도면을 따른다. 목수 작업도 마찬가지다. 도면을 확인하고, 이에 맞게 자재를 준비한다. 이때 기준이 시루시(눈금 표시하기)다. 시루시는 시공하는 목수가 직접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작업반장이나 하청 건설사에서 해주기도 한다. 바쁘게 일하다 보면 누가 해놓은 시루시인지 확인하지 않는다.
나 또한 그렇게 했었다. 쇼쿠닝에게 된통 깨지기 전까지는. “그 히로시 누가 표시한 줄도 모르면서 그냥 작업하냐? 그 시루시 믿고 작업했다가 잘못되면 작업반장한테 책임 떠넘길래? 내 눈으로 도면 확인하고, 내 줄자로 치수 재서, 내 연필로 히로시한 것만 믿는다. 그렇게 작업한 것에 대한 책임 또한 내가 진다. 그게 기본이여.”
둘째, 쇼쿠닝은 일당에 값한다. 우리는 일용직이다. 일을 열심히 하든 안 하든 시간 채우면 무조건 일당을 준다. 그렇다 보니 적당히 시간 죽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쇼쿠닝은 누가 보든 말든 스스로 목표한 작업량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오후 5시가 됐어도 자신이 손댄 건 어떻게든 오사마리(하던 작업을 마무리하는 것) 지으려 한다.
언젠가 만난 쇼쿠닝에게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물었다. “네가 일당 20만 원 받으면 회사에서는 네가 먹은 아침, 점심 두 끼에 간식까지 실제로 25만 원이 들어가거든. 그럼 넌 회사 몫까지 30만원어치는 해줘야 하는겨. 그래야 집 가서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거고. 그게 네가 받은 일당에 책임지는 자세인겨.”
셋째, 쇼쿠닝은 부끄러워할 줄 안다. ‘빨리빨리’가 기본인 우리나라 건설 특성상 데나오시(잘못 시공해 다시 시공하는 것)가 제법 빈번하다. 작업을 시키는 반장이나 시공하는 목수나 보통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어간다. 쇼쿠닝은 안 그런다. 그들 또한 사람이다 보니 드물지만 데나오시를 낸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나이 지긋한 쇼쿠닝 형님과 일했다. 점심 먹고 쉬려는데, 형님이 바로 연장을 챙기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말했다. “오전에 작업한 거 하나가 잘못됐는데, 지금 내려가 후딱 고쳐놓으려고. 남들이 보면 창피하잖어.”
마지막으로 쇼쿠닝은 몸을 사리지 않는다. 그게 뭐 대수냐 싶어도 그렇지 않는 목수, 의외로 많다. 작업복에 톱밥이나 진흙 묻을까 조심조심, 이리저리 눈치 보면서 요령들 피운다. 쇼쿠닝은 작업복에 톱밥이 묻든 진흙이 묻든 개의치 않는다. 자재 들고 나를 때도 마찬가지다. 꾀 부리지 않는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몸 쓰러 왔으면 몸을 써. 네가 잔머리 굴리면 같이 일하는 동료가 고생하는겨.”
송주홍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