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A땐 모르고 당해… 지정학 리스크 ‘기업외교’로 풀어라”

입력 2025-04-22 01:23
이병철 전 삼성전자 부사장(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 연구원)이 21일 국민일보와 만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압박 등 다양한 지정학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한 기업외교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김지훈 기자

삼성전자가 지난 2014년 중국에 첫 반도체 공장을 짓기에 앞서 고려한 지정학 리스크는 북한 핵실험이나 일본 지진 정도였다. 당시 삼성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델과 HP 등 주요 고객사는 공급 차질을 우려하며 해외 공장 분산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만약 삼성이 투자 의사결정 단계에서 지금과 같은 미·중 간 패권 다툼을 변수에 넣었더라면 시안 반도체 공장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삼성 중국본사 부총재로 15년간 중국에서 주재한 이병철 전 삼성전자 부사장(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 연구원)은 최근 발간한 아주대 정치외교학 박사 학위 논문에서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에 지정학 리스크를 극복할 경영의 핵심 수단으로 ‘기업외교’ 키워드를 제시했다. 이 전 부사장은 21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업경영의 중요한 한 축으로서 기업외교를 강화해야 한다”며 “기업외교는 단기 현안을 해결하는 소방수나 기업과 정부를 잇는 연락 창구에 그치지 않고 주요 경영 전략 수립 단계에서 불이 나기 전 리스크를 사전 예방하는 역할로 발전해야 한다”고 밝혔다. 삼성의 경우 2016년 사드 배치로 인한 중국의 보복 위협을 큰 리스크 없이 극복한 것이 대표적 기업외교 사례로 꼽힌다.

그가 삼성 반도체 사례를 중심으로 작성한 논문 ‘지정학적 리스크 하 기업외교’를 보면 미국의 대중국 제재로 삼성은 총 300억 달러를 투입한 시안 반도체 공장 운영과 반도체 판매에 리스크를 떠안았다. 미·중 갈등이 격화할수록 삼성은 중국 내 장비 반입이나 생산능력 확장에 제약을 받는 구조다. 또 미국의 화웨이 반도체 판매 금지 제재로 연간 7조원이 넘는 매출 손실을 감내 중이다.

신기술 냉전 시대에 돌파구가 보이지 않지만 결국 답은 기술 초격차에 있다는 게 이 전 부사장의 견해다. 그는 “대만 TSMC는 ‘실리콘 방패’와 ‘민주주의 칩’으로 불리며 국가 전략자산으로 지정학 가치를 인정받는다”며 “우리도 한국형 반도체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는 ‘이동 표적’과 같다. 이 전 부사장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처음 등장했을 때 기업도 정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다음 조처를 하지 못했다”며 “기업외교는 기존 대관 업무 중심에서 벗어나 합법적 로비 활동 등을 통해 리스크를 사전에 식별하고 예방하는 경영전략”이라고 말했다. 이어 “경제안보 시대 기업외교는 더는 기업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혜원 기자 kime@kmib.co.kr